金炯綺
炯綺1896. 4. 8 ~ 1958. 4.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통영군 통영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4월 8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통영면(統營面) 북신동(北新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통영면 조일정(朝日町)에서 살며 통영면 면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통영 지역에서 만세운동은 배재고보에 재학 중이던 진평헌(陳平軒)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8일 밤 통영 지역 청년 진평헌·권남선(權南善)·양재원(梁在元)·배익조(裵益祚)·모치전(牟治田)·강세제(姜世濟)·이학이(李學伊)·허장완(許璋完) 등 17명과 함께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모여 3월 13일 통영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9일 밤 8시경, 이들과 함께 자신이 근무하는 통영면사무소 등사판을 가지고 10여 리쯤 떨어져 있는 산양면사무소로 가서 그곳의 등사판과 합한 2대의 등사판으로 진평헌이 기초한 「동포에게 격(檄)하노라」라는 격문 1,200여 매를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로부터 고등보통학교 학생 수 명이 통영읍으로 들어왔다는 정보가 통영경찰서로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주도 인물들이 등사에 필요한 용지 2,000매를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구입하였는데, 그 주인이 이 사실을 일제 경찰에 신고하여 즉시 수사에 나섰다. 3월 10일 새벽 1시 30분경, 등사를 끝내고 통영면사무소에 등사판을 돌려주기 위하여 갔다가 강세제·이학이·허장완이 매복 중이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뒤이어 새벽 3시에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통영읍으로 돌아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산청군 산청면(山淸面) 옥동(玉洞) 신영희(申永熙)에게 독립선언서가 은닉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통영 일본군헌병대 분견소장은 가택을 수색하여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압수하고 관계자인 유학생 민영길(閔泳吉) 외 3명을 검거하였다. 통영 청년들의 만세의거 준비는 일제 경찰의 사전 검거로 실패로 끝났으나, 만세시위 예정일인 3월 13일 진명유치원 보모인 문복숙(文福淑)·김순이(金順伊)·양성숙(梁聖淑)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출판은 활판으로 제작한 것이며, 활판이 아닌 것으로 된 것은 출판이 아니다. 등사판을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한 것을 인정하면서 출판법 위반을 적용하는 것은 위법이다”라고 항변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당해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 1921년 음력 4월 10일 몇몇 동지들과 함께 통영면 심상소학교 뒤 송산(松山)에 모여 다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우리 동포는 상해, 간도 또는 철창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대한민국 3년 음력 4월 말일 안에 자유를 찾자는 소식이 있으니 우리를 도와 음력 4월 22일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는 문서를 작성하여 통영면에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붙잡혀 1922년 1월 24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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