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鶴伊
鶴伊1888. 11. 25 ~ 1953. 9.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억군 영해면
- · 병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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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묘곡동(畝谷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김학이(金學伊)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城內洞) 만세시위와 병곡면(柄谷面) 병곡동(柄谷洞)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 지역의 만세운동은 군 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영해·남정(南亭)·지품(知品)·병곡·창수면(蒼水面)의 6개 면에서 일어났다. 이 중 영덕 북부의 영해·창수·병곡면 시위는 경북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다. 영해·병곡·남정면 시위는 기독교와 유림 연합세력이, 지품면 원전동(院前洞)과 영덕면 시위는 기독교 세력이, 지품면 신안동(新安洞)과 창수면 시위는 유림 세력이 주도하였다. 만세시위 계획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기독교 북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처음 제안하였다. 하지만 김세영이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검거됨에 따라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가 다시 계획하였다. 본래 김세영은 영덕 읍내를 만세시위 장소로 제시했지만 정규하에 의해 영해 장터로 수정되었다. 또한 권태원과 정규하의 적극적인 세력 규합 노력으로 권상호(勸相鎬)·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박희락(朴羲洛) 등이 만세시위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송천동의 기독교도인 물론 권씨·남씨·박씨·이씨·백씨 등 영덕의 대표적 유림인 5대 성씨 일족을 규합해 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만세시위 계획에 찬성하여 3월 18일 거사 당일 군중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오후 1시경 정규하·남여명·박희락·권영조(權永祚) 등이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때 김성욱(金聲旭)·조영한(趙榮漢)·김원발(金源發)·손영세(孫永世)·김치운(金致雲)·이상화(李祥和)·장성렬(張星烈)·김실광(金實光) 등과 함께 호응하여 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이끌어 갔다. 시위대는 영해경찰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고 영해공립보통학교로 이동하였다. 여기까지는 평화적인 형태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시 주재소로 돌아온 시위대를 향해 주임순사가 해산을 명령하자 시위는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주임순사 이하 순사들과 순사보들을 구타하고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서 공립보통학교와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체소 등의 시설을 파괴하였다. 오후 2시경 일부 시위대와 함께 병곡면으로 향하였다. 이동 중 연도의 주민까지 가담하게 되면서 시위대는 4, 5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영해에서와 마찬가지로 병곡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주재소 일본 경찰 3명은 시위대를 피해 백석동(白石洞)으로 달아났다가 평해 헌병분견소 인원과 합세하여 시위 군중에게 총을 겨누었다. 시위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군중의 희생을 우려하여 해산을 종용하였고, 그에 따라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9일에도 영해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오전 10시경 포항의 일본 헌병대가,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증파되었다. 일본 헌병과 보병은 함께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행하였고, 그로 인해 8명의 사망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 해산 이후 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하여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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