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92. 6. 5 ~ 1943. 5.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비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이원군 차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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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2년 6월 5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차호면(遮湖面) 경호리(鯨湖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문빈(文彬)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이원군 남면(南面) 용항리(龍項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자료에 홍원군(洪原郡)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오기로 보인다. 1921년경의 직업은 해산물상(海産物商)으로, 상당한 재력과 지역 연락의 용이성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군 차호면의 만세시위와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민족자결주의 고조와 국제 환경의 변화에 힘입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소식은 기독교인 박용해(朴龍海)에 의해 이원군에도 전달되었다. 이도재(李道在)와 동면(東面)의 천도교 교구장인 김병준(金秉濬)은 ‘조선독립단 이원지단(朝鮮獨立團 利原支團)’을 결성하고 관내의 조직적인 시위를 준비하는 한편, 수백부의 관련 인쇄물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사전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고, 거주지인 차호면에서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이원읍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다음날인 3월 11일 오후 1시경 주민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차호보통학교 교정으로 집결시켰다. 이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독립연설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군중을 이끌고 “조선독립국”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 1,500여 명을 이끌고 차호리 시장과 교회를 행진하고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등에서 만세를 삼창하는 등 평화 시위를 전개하고 오후 4시경 해산하였다. 그러나 시위 주도자 검거에 나선 일본 경찰에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자신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정의와 인도를 앙모하는 세계 평화민족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독립군비단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말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의 한인 사회는 만세운동에 큰 자극을 받고, 이희삼(李熙三)·윤덕보(尹德甫)·김찬(金燦)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단체로서 대한독립군비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경에서 일본 군경과 10여 차례 교전을 벌였으며, 국내에서도 독립군 결성의 인적·물적 자원을 모집하였다. 특히 군비단의 주요 임원 상당수는 함남 단천(端川)·북청(北淸)·이원 출신이었으며, 출신지에 근거한 배경과 관계망으로 국경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경찰서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대한독립군비단에 참여하여 요직을 맡았다. 1919년 9월 총무부(總務部) 임원, 1920년 11월 서기(書記), 1921년 무기감수(武器監守) 수령(守令)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대에는 군비단이 출장대를 조직하여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연락 업무에서 남만주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군비단 활동이 이동휘(李東輝) 등을 통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면서, 연통제(聯通制)가 국내에 시행되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1920년 12월 함남 이원의 연통제 운영에서 참의(參議)로서 임시정부와의 연락과 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하였다. 1921년 초 대한독립군비단은 함남 통신사무국장 이동백(李東白)의 지휘 하에 함남 풍산군(豊山郡)에 통신지국(通信支局)을 설치하고 이를 이원군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원군 출신 김창렬(金昌烈)·주병록(朱丙錄) 등과 함께 이를 주도하면서 이원군 남면 염분리(鹽盆里)에 이원청년회(利原靑年會)라는 가칭으로 통신지국을 설치하고 관내 통신·모집·교육 등의 사업을 관장하였다. 특히 1921년 1월 군비단의 훈령을 지참하고 대한독립군비총단 군사부장(軍師部長) 명의로 관내에서 단원과 군자금 모집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 일로 1921년 2월 19일 동료 15명과 함께 붙잡혔지만, 옥고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경 동선상회(東鮮商會)를 운영하며 조선인 해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교육사업에 대한 기부, 사설강습소 개최 등에 힘썼다. 1928년 11월경 동아일보사 차호분국(遮湖分局) 총무 겸 기자를 거쳐, 차호 분국장을 1936년까지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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