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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운

金致雲

1868. 10. 3 ~ 193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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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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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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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 · 병곡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8년 10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영덕군 영해면과 병곡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영덕군의 만세시위는 3월 12일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기독교 북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과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튿날 김세영이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어 만세시위 준비는 권태원에게 맡겨졌다. 권태원은 3월 15일 병곡면 송천동 기독교 북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였다. 정규하는 만세시위 장소로 김세영이 제시한 영덕면 대신 영해장터를 제안하였다. 이 자리에 박희락(朴羲洛)·서삼진(徐三辰)·조영한(趙榮漢) 등과 함께 동석하여 만세시위에 찬성하였다. 이후 주도자들은 만세시위를 위해 각 마을에 집거하고 있는 친족 집단들과 기독교인을 규합하는데 힘썼다. 1919년 3월 18일 영해 장터에는 정규하를 비롯한 기독교인들과 송천동의 권씨 일족, 남효직과 남여명이 인솔해 온 사람들과 단순히 장을 보러 온 사람들까지 합쳐 3,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정규하·박희락·남여명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의 행진을 이끌었다. 영해경찰관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린 이후에는 주재소,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체소 등의 시설 파괴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시위 도중 일부 시위대를 이끌고 병곡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 지나가는 마을의 주민이 가담하면서 시위대는 4, 5백명 규모로 늘어났다. 병곡면에 도착한 시위대는 영해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오전 10시경 포항의 일본 헌병대가, 오후 5시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도착하여 발포하며 시위대 진압에 나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 해산 이후에는 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면서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항소하여,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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