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남규
文南奎1870. 6. 23 ~ 1932. 2.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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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70년 6월 23일 제주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문남규(文南圭)이다. 1918년 법정사 항일 시위에 참여하였다. 법정사 항일 시위는 1919년 만세운동 직전에 일어난 제주도 최대의 무력 항쟁이었다. 법정사 항일 시위를 이끈 사람은 경북 영일군 출신의 태을교(太乙敎) 지도자 김연일(金連日)이었다. 항일 무력 항쟁은 1918년 10월 4일부터 시작되었고, 10월 5일에는 법정사에서 무력 항쟁에 동참하고자 하는 청장년 33명으로 선동대가 결성되었다. 이때 49세의 나이로 동생인 문남은(文南恩)과 함께 선동대에 참여하였다. 이날 김연일은 자신이 불무황제임을 선포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 방동화(房東華)와 강민수를 좌우대장, 양남구(梁南久)를 중군대장, 김삼만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모사(謀師)에 임명하였다.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집결한 선봉대 33명의 일원으로 서귀포 방면에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다. 선봉대는 화승총 3정, 몽둥이 수십 개와 큰 깃발을 내세우고 절을 내려갔다. 이 때 양남구·고용석(高用錫)과 함께 화승총을 들었다. 법정사에서 출발한 선봉대는 산을 내려가 마을에서 참여자 모집에 나섰다. 선봉대는 도순리(道順里)·영남리(瀛南里)·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를 돌며 대오를 꾸렸다. 항쟁 지도자인 박주석과 강창규는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中文里)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항쟁 대오는 중문리로 향하던 중 강정리(江汀里)와 도순리 사이에 있는 대천(大川) 연변에서 서귀포부터 제주성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 하원리(河源里)에 이르자 참가자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 하원리에서 중문리로 향하던 중 마주친 일본인과 기독교 목사 일행에게 양남구, 김상언(金商彦) 등과 함께 앞장서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러 경찰주재소장인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포박한 뒤 경찰주재소에 갇혀있던 13명을 풀어주었고,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결국 오전 11시경 서귀포경찰주재소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자 항쟁 대오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날 38명이 체포되었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이 무력 항쟁으로 66명이 구속되었고 31명이 실형을 받았다. 그 중 2명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10월 7일 붙잡혀 10월 21일 구속되었다. 1919년 2월 4일 열린 재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은사령’에 의해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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