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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百容

百容

1885. 10. 16 ~ 196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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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盧百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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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金海)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김해청년회
  • · 김해제4회
  • · 북풍회
  • · 조선공산당
  • · 신간회
  • · 민주주의민족전선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8)

관련 사건

  • ·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8) 1885년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우부면(右部面) 봉황동(鳳凰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1911년 밀양공립보통학교, 1912~1919년 김해공립보통학교 훈도(訓導)를 역임하였다. 1921년 5월 2일 조선교육개선건의안 제출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김해청년회 의사부장이 되었다. 4월 김해연합대강연회에 김해교육회 대표로 참석하여 ‘교육회와 김해 장래에 대하여’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였다. 1923년 2월 3일 김해청년회 소년부(少年部)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잘살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3년 사상단체 김해제4회(金海第四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북풍회(北風會)·북성회(北星會)에서도 활동하였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를 지냈다. 이듬해 4월 4~5일 양일간 열린 경남기자대회(慶南記者大會)에서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의 신분으로 제1일차 대회의 의장으로 대회 진행을 맡았다. 1924년 항일투쟁교육의 전당이었던 김해사립합성학교(金海私立合成學校) 교원을 지냈다. 1924년 5월 김해경찰서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부산청년회 회장 김종범(金鍾範)에게 철도할인 승차권과 교원신원증명서를 발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 간친회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김해에서 사회사정비판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경남대표로 참석하여 13인의 대의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2월 21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侍天敎) 회당에서 열린 정우회(正友會) 임시총회에 51명의 참가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정우회 해체 결의를 가결하였다. 그 해 5월 8일 김해농민동맹 주최로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의 낙성식을 기념하여 각 단체연합 대강연회를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는데, 7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문맹퇴치의 근본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1927년 10월 30일 울산 방어진에서 열린 울산 사회단체 8개의 연합간담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신간회 김해지회 준비위원, 그 해 조선공산당 경남도책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4일 경남기자대회 겸 경남기자연맹 총회가 열렸을 당시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하였고,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2월 27일 조선공산당 경남 도간부로 활동하다가,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으로 김해에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년 6개월이 지난 1929년 10월 28일 예심 종결 때 32명 가운데 송영섭(宋寧燮)과 면소 처분을 받고 1년 10개월만에 풀려났다. 1930년 4월 12일 밀양(密陽) 조일극장에서 열린 제5회 경남기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1930년 8월 4일 김해 신간지회의 합의로 김해각사회연합수재동포구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여 창립하였을 때 조선일보 지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신간회(新幹會) 김해지역 대표회원 후보, 11월 9일 5명의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10월 독립자금 모집(일명 ‘공갈 사건’)을 이유로 송기송(宋基松)과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은 1926년 1월경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만주 봉천성 흥경 소재) 특파원 송기송이 독립자금을 얻기 위해 김해면 마마리에 사는 허토발(許土發)에게 1만원을 받으려고 하다가 체포된 사건이다. 당시 송기송과 연락하고 1930년 6월 1일 송기송이 출옥하자, 허토발로부터 3,000원을 받은 사건으로 1931년 2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협박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31년 4월 2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0월 19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소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위원장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부위원장, 2월 16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위원과 경남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부산에서 미군정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7월 부산에서 조선신문기자회 경남지부에서 광복 1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회의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측 대표로 참석하고, 8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세계노련가입 축하대회에 참석하였다. 1947년 2월 21일 3·1절 기념제전을 맞이하여 경남도준비위원 102명 가운데 김해군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7년 7월 미소공동위원회 경축 및 임정수립촉진대회 임시집행부로 선임되었다. 7월 28일 여운형(呂運亨) 인민장 경남도 봉도식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위원장단으로 참가하였다. 8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지부 대표로서 미소공위 양측 대표단에 인민대회 결정서를 제출하였다. 1949년 11월 20일 박용선(朴容善)·윤일(尹一)·박일형(朴日馨) 등과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경상남도연맹에 가입하고 경상남도연맹 간사장에 선출되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 1950년 8월 부산에서 방첩대에 붙잡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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