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순
南相舜1878. 7. 21 ~ 1949. 2.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0)
관련 사건
- · 토지조사사업 측량 반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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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0) 1878년 7월 21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정곡면(正谷面) 성황리(城隍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윤(和允), 호는 죽정(竹亭)이다. 1914년 정곡면장으로 있으면서 일제가 토지수탈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자 주민들과 함께 적극 항거하였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동(中橋洞) 동쪽 방향 일대의 토지는 같은 면 죽전리(竹田里)·성황리(城隍里)·예리(禮里)·중교리(中橋里) 등 4개 마을의 주민들이 개간하여 만든 토지로 수년 전부터 지세(地稅)를 납부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런데 일제는 기존 관행을 무시하고 이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고 임의로 조선농업주식회사(朝鮮農業株式會社)에 불하하였다. 그 결과 1914년 8월 26일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서 이 지역에 직원을 파견하여 측량을 강행하고자 하였다. 당시 정곡면장으로서 이러한 소식을 사전에 듣고 토지소유자이자 지역 유지인 전중진(田中鎭)·남병우(南炳祐)·이진우(李震雨) 등과 논의한 후, 다수의 주민들을 측량 현장에 모아 토지 측량을 적극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면내 각 가호에 토지소유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을 이장에게도 응하지 않으면 벌금을 거두겠다는 뜻을 통고하고 동참을 독려하였다. 1914년 8월 26일 임시토지조사국 기수(技手)인 일본인 시마다 시게이치(島田滋一) 등이 해당 지역을 측량하고 조사원들이 부근 토지소유자들을 입회(立會)시켰다. 당시 조선농업주식회사 대표인 미나미 카시이치로(南賢一郞)도 직접 방문하였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박기양(朴璂陽)이 그를 안내하였고 실측 후 표찰(標札)을 세우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이에 그 부근에 모여 있던 동민 수백 명에게 “이번 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므로 단연코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절규하였다. 동시에 이들을 지휘하여 곧바로 현장으로 가서 조사원들을 비방하고 조사원들이 심어놓은 표찰을 뽑아버렸다. 또한 이 회사의 고용인 강한득(姜韓得)이 등에 지고 있던 원목(杬木)도 빼앗아 던져버렸다. 주민들과 함께 박기양을 잡아서 구타하였고 입회한 경찰관의 보호를 받고 도망가던 그를 쫓아갔다. 중교동의 이인섭(李仁燮)이 경영하던 주막까지 추격하여 그의 집을 포위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사위원들의 토지측량이 용이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다음날인 8월 27일 측량지와 기타 각 지역에 모여 있던 조사원들은 경찰관의 비호를 받으며 박기양의 안내에 따라 조사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다시 현장에 모여든 군중은 표찰을 철거하고 박기양을 인사불성이 되도록 난타한 후 수레에 실어 의령군 읍내로 옮겼다. 수많은 군중은 수레를 뒤엎어버리고 거듭 박기양을 구타하였다. 이후 박기양이 정곡면 중교동 심영택(沈榮澤)의 주막으로 재차 피신하자 이 집을 포위하고 계속 비방하였다. 결국 조사국원들이 측량을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소요의 주도자로 지목되었고 임시토지조사국원의 공무집행 방해 등 혐의로 붙잡혔다. 이후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와 상해죄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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