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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만

高仕萬

1908. 10. 23 ~ 196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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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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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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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제주혁우동맹
  • ·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32년 해녀투쟁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908년 10월 23일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면(舊左面) 종달리(終達里)에서 고행량(高行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1928년에 결성된 제주청년동맹이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지하운동을 시작하면서 1930년 3월 20일 구좌면 일대에 비밀 조직인 혁우동맹(革友同盟)이 결성되었다. 제4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申才弘)이 구좌면 세화리(細花里)에 있는 김시화(金時和)의 집에서 오문규(吳文奎)·강관순(康寬順)·김성오(金聲五)·김순종(金順鍾)·김시곤(金時坤)·부대현(夫大炫)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혁우동맹은 해녀 운동의 지도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30년 9월 20일 김시화의 집에 신재홍·오문규·김순종·김시곤·한향택(韓香澤) 등이 모여 해녀 운동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10월에는 신재홍·한원택(韓遠澤)·채재오(蔡載五) 등이 해녀 스스로 해녀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도하는 방법에 대해 협의하였다. 11월 초순까지 이어진 해녀 운동에 관한 협의는 혁신동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여 1931년 4월 자진 해산하면서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강창보(姜昌輔)가 1931년 1월 4일 제주도에 돌아온 후 신재홍·부태환(夫泰煥)·김민화(金玟華)·김한정(金漢貞)·장종식(張鍾植) 등과 함께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5월 16일에는 강창보의 주도로 신재홍·이익우(李益雨)·오대진(吳大進)·김한정 등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들어갔다. 구좌면 야체이카를 담당한 신재홍은 이해 7월 초순부터 세화리·연평리(演坪里)·종달리를 돌며 오문규·문도배(文道培)·강관순·김성오 등 혁우동맹 출신들을 야체이카에 끌어들였는데, 이때 야체이카에 가담하였다. 9월 27일 종달리에서 열린 시사보도강연회에서 신재홍, 한원택 등과 함께 강연하였다. ‘중일전쟁은 자본가에게 이익을 줄 뿐이고 노동자나 농민에게는 오직 전쟁의 희생만이 강요될 뿐이다’라는 것이 그날 강연 요지였다. 이후 구좌면 야체이카는 농민의 이익을 도모하는 농민 단체와 기존의 해녀어업조합과는 별도로 해녀를 본위로 하고, 해녀에게 이익이 되는 해녀조합을 조직하도록 지도하는 데 힘썼다. 먼저 11월 3일 신재홍·한향택·한원택 등과 함께 종달리에 혁명적 농민조합 설립 계획을 세웠다. 농민조합은 ‘농민의 피를 짜는 악질 조합 반대, 종묘 강제 배포 반대, 무상 부역 반대, 농민 대중의 이익에 배치는 면(面) 행정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해녀 운동은 제주도사(濟州島司)가 해녀어업조합 조합장을 겸직하면서 일본인 상인과 결탁하여 해녀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구좌면 하도리(下道里) 해녀들의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1932년 1월 7일 하도리에 사는 해녀 300여 명은 해녀 복장으로 하도리를 출발하여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 행진을 벌였다. 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을 마치고 해녀어업조합 본부를 향하여 행진을 하던 중 경찰의 제지로 해산하였다. 1월 12일에는 구좌면과 성산면(城山面)의 6개 마을에 사는 1,000여 명의 해녀가 다시 시위를 벌였다. 마침 지역 순시를 하던 제주도사를 포위하고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것을 압박하였다. 제주도사는 세화주재소로 피신하였고 주동한 해녀 20여 명이 붙잡혔다. 이 일로 1월 24일 새벽에 해녀 500여 명이 세화주재소로 동료를 구한다며 몰려갔고, 1월 26일에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해녀 100여 명이 다시 세화주재소에 몰려가기도 하였다. 1932년 3월 연이은 해녀 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종달리의 야체이카 조직원 8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잡힌 8명 중 한향택·한원택·채제오와 함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제주도에 조직되었던 야체이카가 발각되면서 100여 명이 잡혀갔다.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이 지연되면서 1년 10개월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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