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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喜祚

喜祚

1871. 6. 11 ~ 1930.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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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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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南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남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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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남해군 남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6월 11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남해면(南海面) 아산리(牙山里, 현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희조(金喜兆)를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1919년 4월 4일 남해군 읍내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남해군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2일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남양리(南陽里)의 이예모(李禮模)가 하동군(河東郡)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면서 시작되었다. 독립선언서와 함께 전국적인 만세의거의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의 청년 유지들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에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4월 3일 이예모는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남해면 읍내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고현면장(古縣面長) 김치관(金致寬)이 남해경찰관주재소에 이를 알린 사실을 알게 된 시위대는 다음날 남해군 읍내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1919년 4월 4일 아침 마을 주민들과 함께 남해군 읍내 시장으로 나아갔다. 전날의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3시경이 되자 사전에 약속된 신호에 따라 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일제히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남해경찰관주재소와 남해군청, 남해공립보통학교(현 남해초등학교), 남해우편국 등을 돌면서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와 함께 경찰에게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남해경찰관주재소 경찰들과 삼천포에서 지원을 나온 일본군 등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4월 6일 남해경찰관주재소의 요청에 따라 사천경찰서 경찰과 일본 헌병 수십 명이 급파되어 주도 인물 23명을 검거하였다. 이때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고문 등 가혹한 조사를 받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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