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희덕

金熙德

1878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희덕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황해 수안(遂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수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소촌리(蘇村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3세로,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0년 설치된 천도교 수안교구는 1914년 대교구제가 실시되면서 황해도 동부 산악지대인 신계교구, 곡산교구와 함께 서흥대교구 산하에 편성되었다. 수안군의 만세운동은 이러한 지역적 연관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시작되었다. 곡산의 천도교인인 이경섭(李景燮)은 1919년 2월 28일 보성사(普成社) 사장이자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황해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흥군(瑞興郡)을 거쳐 수안군으로 온 이경섭은 3월 1일 저녁 수안교구의 평의원이자 공선원(共宣員)인 이종숙(李宗淑)의 집에서 수안지역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모임에는 수안교구의 교구장인 안봉하(安鳳河)와 김영만(金永萬), 홍석정(洪錫禎), 홍순걸(洪淳杰) 등 전 교구장, 그리고 공선원인 나찬홍(羅燦洪)과 최용식(崔鎔植), 전교사(傳敎師)인 한청일(韓淸)- 등이 참석하였다. 이 날 회합에서 이경섭은 3월 1일을 기해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이니, 수안지역에서도 독립선언서를 군내에 널리 배포하고 서울처럼 만세시위를 전개하라는 이종일의 지시와 함께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전달하였다. 수안의 천도교 지도부는 이에 적극 호응하기로 결의하였다. 안봉하, 이영철(李永喆), 이달하(李達河), 나용일(羅龍日), 홍두옥(洪斗玉) 등은 3월 2일을 맞아 석교리(石橋里)에 위치한 수안교구 교구실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인들을 모아 3월 3일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과 헌병 분대를 넘겨받을 것, 그리고 그 실행 방법은 홍석정과 한청일이 담당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시행되기 전에 용담리(龍潭里)에 위치한 수안헌병분대(遂安憲兵分隊)에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3월 2일 오후 수안지역 천도교 지도부 11명이 교구실에서 붙잡혀 수안헌병분대로 연행되었다. 이때 검거를 모면한 홍석정 등은 당일 밤 수안지역의 천도교 중심 인물들과 연락을 통해 예정대로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알렸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면, 대천면(大千面), 연암면(延岩面) 등에서 모인 천도교인 130~140명이 수안교구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수안금융조합 사무소를 거쳐 수안헌병 분대 앞마당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조선은 독립하였으며 자유와 공화정치는 대세임을 주창하였다. 또한 수안헌병분대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수안헌병 분대장이 서울 본부에 명령을 받아야 하니 일단 물러갈 것을 요청하자, 2인을 대표자로 남기고 교구로 돌아왔다. 오전 11시경 수안헌병분대 앞에 재집결한 100여명의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다시 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오전 11시경 헌병분대 앞에서 다시 헌병분대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에 일본 헌병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일 천도교 수안교구(遂安敎區) 관계자로부터 3월 3일 만세시위를 위해 수안교구로 집합하라는 연락을 받고 도착했을 때, 이미 오전의 시위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되어 상황은 고조되어 있었다. 이때 한청일과 홍석정의 지휘 하에 다시 헌병분대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석두(梁石斗)·오병선(吳炳善)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대로 돌진하여 문간에 설치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분대의 이양을 강력히 요구하며 압박하였다. 이에 헌병분대는 다시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이 내란죄로 관할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고,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은 공소불수리 처분을 내렸다. 결국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저택 침입 등으로 징역 1년 3월(미결 구류 일수 4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