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稀杰
稀杰186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황주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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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천주면(天柱面) 내교리(內橋里)에서 태어났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2세로, 186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만세운동 당시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황주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염원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자,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다. 천도교 인사로부터 황주면의 장날인 3월 2일 성남리(城南里)에 위치한 남천시장(南川市場)에서 만세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전해 들었다. 황주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천도교 중화교구의 최창룡(崔昌龍)이 황주에 와서 천도교 황주교구의 교구장인 김성준(金聲駿)을 만나 독립선언서 10매를 전달하며 시작되었다. 김성준은 황기타(黃己拕) 등 황주면 천도교의 주요 인물들을 교구당으로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최창룡에게 들은 서울 만세시위 상황을 전달하는 한편, 3월 2일 성남리의 남천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역할 분담을 하고 독립선언서 배포는 황기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또한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趙鎭永), 성남리의 김병식(金炳植), 황강리(黃崗里)의 김광섭(金光燮)과 최석길(崔錫吉) 등 황주 천도교의 주요 인물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1919년 3월 2일, 주민들과 함께 남천시장으로 나갔다. 남천시장에는 만세시위를 위해 온 천도교인들과 시장을 보러 온 군중들 수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시장 여기저기에는 독립선언서가 나붙었다. 오후 2시 황기타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황주군 전역에서 온 이들과 결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다른 천도교인들과 함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경찰서 쪽으로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두 사람을 붙잡았다. 시위대는 이에 맞서 경찰서로 향하였고, 경찰서 앞에서 붙잡힌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위대는 경찰서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한편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유리창을 깨뜨렸다. 또한 한국인 경찰들에게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시위대는 경찰서를 지나 기독교 예배당까지 행진한 후,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정돈하였다. 예배당 앞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다수 동참하며 시위대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천시장으로 복귀한 시위대는 만세시위를 평화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200여 명의 천도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황주교구의 교구당으로 가서 휴식을 취할 때 경찰들은 다른 지역으로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소방조까지 동원하여 순찰과 감시를 강화하였다. 또한 천도교인들의 집을 수색하기도 하였다. 3월 2일 오후 5시 경찰과 헌병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람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천도교 황주교구의 교구당으로 진입하여 천도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붙잡았다. 이 와중에 천도교인 8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나는 경술국치 이래 독립을 희망해 왔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창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 민족으로서 당연히 만세를 외친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그 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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