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興鳳
興鳳1898. 8. 20 ~ 1983. 3.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4)
관련 사건
- · 해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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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4) 1898년 8월 20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해남면(海南面) 복평리(伏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신자였다. 1919년 4월 11일 김동훈(金東勳) 등이 주도하여 해남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이래 서울과 각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해남 읍내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어 갔다. 특히 4월 6일에는 읍내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동훈과 남상권(南相權)·안창석(安昌錫) 등 마을 청년들의 주도로 다음 장날인 11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몰래 대량으로 제작하고 시위 준비를 해나갔다. 4월 8일 시위 준비과정에서 김동훈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듣고 시위에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4월 10일에는 만세시위 때 대열의 앞에 세우고 행진할 대형 국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당목(唐木) 3척(尺)을 김동훈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4월 11일 정오 무렵에 주도자들과 함께 해남면 본정(本町)에 있는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대형 태극기 6개와 종이 태극기 800개를 들고 나와서 신작로로 행진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당목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해남 시장에 들어서서는 종이로 만든 작은 태극기를 장터에 나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시위가 점차 거세지면서 해남보통학교 학생들과 다른 군민들까지 합세하여 오후 4시 무렵에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제 경찰과의 충돌로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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