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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興龍

興龍

1897. 9. 13 ~ 195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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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興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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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海南)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해남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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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0)

관련 사건

  • · 해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0) 1897년 9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해남면(海南面) 대화리(大和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 운동 당시 해남군 마산면(馬山面) 복평리(伏坪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해남면 해남읍(海南邑)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울과 각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해남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어 갔다. 4월 6일에는 해남 읍내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는 해남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4월 1일부터 시위를 계획하던 김동훈(金東勳)은 남상권(南相權)·안창석(安昌錫) 등과 함께 4월 3일부터 4월 10일까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 800여 매와 당목(唐木)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 6매를 몰래 제작하며 시위 준비를 해나갔다. 거사일로 예정된 4월 11일 장날 아침에 김동훈이 주도한 시위 군중은 해남면 본정(本町)에 있는 천병유(千炳有)의 집에서 출발하여 해남 읍내로 통하는 신작로를 따라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준비해 온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였다. 이들의 행진이 계속 진행되면서 참여하는 시위 군중이 늘어났다. 해남 시장에서 김동훈으로부터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찬성하여 깃발을 넘겨받고는 시위 행렬에 가세하였다. 이후 읍내에서 직접 깃발을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행진을 벌이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가 진행되던 도중 해남보통학교 학생들도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였고, 다른 군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이날 오후 일본 경찰이 출동해 무력으로 시위 행진을 저지하면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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