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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성

金後性

1896. 9. 28 ~ 197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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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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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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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풍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2) 1896년 9월 2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노리(魯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이명으로 김종화(金鍾和)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4일 풍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동의 독립만세시위에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만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3월 17일부터 23일까지가 절정기였다. 안동군 19개면 중 11군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면들은 장이 서지 않는 작은 면들이었다. 시위는 주로 장날에 장터를 이용하여 일어났는데, 안동 지역 14회 시위 중 8회가 장날에 일어났다 3월 23일 안동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서후면(西後面)·와룡면(臥龍面)·남선면(南先面)·남후면(南後面)·풍산면(豊山面) 등에 사는 주민들이 운집하였다. 오후 7시 무렵 3천여 명의 군중이 3월 18일 시위로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하자며 안동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몰려가 기물을 파손하며 공세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수비대가 공포를 쏘며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이에 수비대가 실탄을 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는 북서쪽 산 위로 철수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다음날 새벽 4시 해산하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풍산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오후 3시 30분 권영헌(權寧憲)·전성철(全聖哲) 등과 함께 기독교인 30여 명을 이끌고 풍산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안동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세력들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안동면 만세시위는 안동교회(安東敎會)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계와 송기식(宋基植) 등의 유림계에 의해 준비되었다. 안동교회 목사 김영옥(金泳玉), 장로 이중희(李重熙)·김병우(金炳宇) 등이 이끄는 기독교계와 송기식(宋基植)을 비롯한 유림계가 안동면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동시에 전성철을 통해 풍산면 만세시위를 유도하였다. 동생 김후근(金厚根)은 임동면(臨東面) 유동복(柳東馥)의 집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가져왔다. 동화학교(東華學校) 학생들도 이 날 시위에 동참하였다. 시위는 수비대에 의해 곧바로 해산 당하였다. 오후 11시에는 풍산면 만운동(晩雲洞)에 사는 마부 박재욱(朴在旭)이 풍산주재소 앞 국도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다 붙잡혔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조선 민족으로서 조선 독립에 대해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불렀던 것이고 하등 보안법을 위반할만한 행위는 조금도 없었다”고 항변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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