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桓起
桓起1888. 3. 2 ~ 1950. 6.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양양군 강현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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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2) 1888년 3월 2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사교리(沙橋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과 6일 양양군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 주민들이 협조하여 강현면 물유리(沕溜里)에 있는 물치시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 사는 이석범(李錫範)이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워 추진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물유리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도천면에서는 김영경(金英經), 강현면에서는 장세환(張世煥)이 주민 동원을 맡았다. 이어 구체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질 때, 적은리(積銀里)에서 김철기(金哲起)와 함께 책임을 맡아 태극기를 만들며 주민을 조직화하였다. 4월 5일 강현면의 시위 군중은 물치장터에 모였고 도천면의 시위 군중은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大浦里)에 모였다. 강현면에서는 계획대로 아침부터 각 마을에서 주민들이 물치장터로 떠났다. 물치장터로 모여든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오전 10시 무렵 물치장터에 있는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대형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 태극기를 든 1,000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였다. 강현면 시위대는 물치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약 10리 정도 떨어진 대포리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도천면민과 합세하였다. 시위대가 경찰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자 주재소 수석 이시다(石田喜三郞)는 군중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었다. 이에 시위대는 다음날 양양면(襄陽面)으로 가서 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다음 날인 4월 6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은 양양면으로 향하였다. 1,000여 명이 넘는 시위대는 양양면 연창리(連昌里)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시위대는 일본군의 저지선을 뚫고 면소재지로 들어가 경찰서로 몰려갔다. 손양면(巽陽面)에서 온 시위 군중 약 300여 명도 합세하였다. 경찰서장이 나서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시위 군중은 저녁에 해산하였다. 4월 5일과 6일 양일간 일제 군경의 만세시위 주도자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나면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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