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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

金衡鎭

1879. 8. 22 ~ 1957.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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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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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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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9년 8월 2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천전리의 구장區長을 맡고 있었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구속당한 시위 주도자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군경에게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안동 지역에서는 3월 13일 안동면(安東面)에서 이상동(李相東)의 단독시위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개의 면(面) 가운데 11개의 면에서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14차례의 시위가 벌어졌다. 예안면에서의 시위는 이상동 단독시위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군중들이 참여한 시위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희망하던 중 1919년 3월 17일 예안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비밀리에 전해 들었다. 이날의 계획은 1919년 3월 11일 밤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면사무소 숙직실에 면서기와 유지들을 불러서 사전에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면사무소 등사판을 숙직실로 가져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각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알려 사람들을 모았다. 1919년 3월 17일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예안 장터로 향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20~30명의 군중들이 일제가 일왕의 즉위극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장터 인근에 있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러자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약 1,500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군경이 들이닥쳐 면서기와 주도자 20명을 체포하였다. 격분한 군중은 오후 6시경 예안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서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제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김두진(金斗鎭)과 함께 선두에서 주재소의 유리창을 부수며 구속자 탈환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헌병들에게 진압되면서 24명의 주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6월 1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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