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金炯周1898. 9. 21 ~ 1962. 10.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강화군 읍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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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98년 9월 21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하도면(下道面) 상방리(上防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기독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읍내면의 만세시위 계획은 기독교 북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3월초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에 살던 유봉진(劉鳳鎭)에게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黃道文)이 방문하여 서울의 운동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9일 오후 3시경 길직리(吉稷里) 예수교회당에서 길직리와 선두리(船頭里), 온수리, 상방리 주민이 모여 회합을 가지면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 모임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군중들이 ‘조선독립’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강화읍내 시장을 행진하였다. 유희철(劉熙哲)·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장동원(張東元)·장명순(張明淳) 등이 앞장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시장에서 군청, 객사, 공자묘 등을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강화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1만~2만 명에 달하여 강화경찰서는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다. 군청 앞에서 독립연설회가 진행되었고 “조선독립을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하여 파괴하겠다”는 말에 강화군수 이봉종도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오후 5시경에는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여 유희철·장상용(張相用)·조기신(趙基信) 등이 풀려났다. 군중들은 시위를 계속하다 오후 11시경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19일 오전 8시부터 일제가 용산에서 보낸 보병 대위 이하 40명의 군인들로 시위참가자들을 체포할 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 및 벌금 20원(미결 구류 일수 150일 본형 산입, 벌금을 납부하지 않을 시에는 20일간 노역장 유치)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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