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술
金泰述189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평양 숭덕학교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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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계성학교(啟聖學校)를 마치고,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대학부에 진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이 대학 3학년으로 평양부(平壤府) 신양리(新陽里)에 거주하며 평양의 만세시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개항 이후 평양은 선교사들의 활발한 진출과 새로운 교육의 기회에 부응하여 기존 사회를 탈피하려는 서북인의 노력이 결합되어 개신교계 학교가 번성한 지역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베어드(W. M. Baird)와 모펫(S. A. Moffet) 부부 등은 1894년 초등교육를 위한 숭덕학교(崇德學校), 1897년 중·고등교육을 위한 숭실학교를 길선주(吉善宙) 등의 도움을 받아 설립하였다. 창립자인 모펫과 길선주뿐만 아니라 선교사 모우리(E. M. Mowry) 역시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관계로 해당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민족정신이 투철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식민지 독립, 민족자결주의 운동의 고조를 맞이하여 1918년 말부터 기독교계에서는 독립운동의 전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서북지역의 주요 민족·사회운동의 지도자였던 이승훈(李昇薰)은 1918년 선천의 7회 장로교 총회에서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길선주·안세환(安世桓) 등과 함께 2월 말에 시위를 준비하였으며, 서울은 물론 상하이(上海)의 기독교계와 함께 연계하고 있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숭덕학교 교정에서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1,000여 명의 인원을 모집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독립에 관한 연설과 애국가 제창을 시행하였다. 이들 외에도 평양에서는 감리교 계열 기독교인들이 남산현 교회에서, 천도교인들이 평양 천도교당에서 각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총 3곳에서 동시에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합류하여 일본인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는 물론 평양경찰서로 나아가 일본 경찰 및 소방대와 충돌하였고, 경찰서에 투석을 하였다. 이 당시 숭실학교 대학부 3학년으로 숭덕학교 교정에서 일어난 3월 1일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때 일본 헌병에 의해 시위대가 강제 해산되는 과정에서 간신히 체포를 모면하였다. 이후 동료들을 모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문건을 작성·유포하고자 하였다. 숭실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선교사가 합류하여 다시 10여인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들은 인원을 나누어 각 선교사의 집에서 비밀리에 문건을 작성하고 등사하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5일경부터 학생 박기복(朴基福)·이인선(李仁善)과 교사 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모우리의 집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비롯하여 「경고」·「급고」·「시기를 잃지 마라」 등의 문건을 등사하여 평양 시내에 배포하였다. 이런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4월 4일 선교사,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일자 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의 1심을 거쳐,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동료 이보식(李輔植)·이겸호(李謙浩) 등과 함께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인류의 상정이니, 민족자결의 시점을 맞이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것으로, 이는 조선 민족인 자의 정당한 행위이므로 징벌을 받을 죄가 아니다”라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복학하여 학업에 힘쓰는 한편 전도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1920년 8월에는 평양연합청년전도회에 속하여 교회부흥을 위한 전도 활동에 나섰다. 같은 해 8월 20일에는 평북 안주에서 숭실전도대와 함께 강연을 하였는데, “우리가 실력이 있으면 왜 남에게 수치를 당하리오”라는 말을 하여 감시 중이던 경찰의 제지를 받고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23일 숭실학교 대학부를 졸업하였다. 숭실학교 졸업 후 대구 계성학교에서 근무하며 체육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그러다가 1924년 3월 20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워싱턴대학 공과를 졸업하고 보스턴대학 공과에 입학하여 연구과에서 전기학을 전공하던 중 1927년 12월 9일 전미주(全美洲) 대학정구선수권대회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숭실학교 재학 당시에는 축구와 야구 선수로 활동하였고, 워싱턴대학에서는 정구 선수로 활동하였다. 1929년 보스턴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계속 보스턴에 거주하였다. 1928년 동료들과 함께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1937년 2월 28일에도 보스턴에 거주하는 동료들과 함께 3·1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37년 박종만이 운영하는 삼원회사를 사직하고 박돈욱과 함께 남경식물제조회사를 설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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