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형식

金炯植

1870. 6. 17 ~ 1910. 8. 26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형식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전남 영광(靈光)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영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일심계
  • · 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0년 6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대마면(大馬面) 원흥(元興)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인 김용구(金容球)가 집안의 조카이다. 이명(異名)으로는 김성식(金聖植)과 김군칙(金君則)을 사용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해 활동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국권을 상실할 위기 속에 다양한 항일단체들이 결성되어 이에 대응하였다. 1906년 족질(族姪) 김용구와 함께 기삼연(奇參衍)을 찾아가 복수토적(復讐討賊)을 기치로 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였다. 일심계는 국권회복을 도모할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매달 계원 모임을 통해 거의와 관련된 협의와 동조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때 일심계원과 뜻을 같이한 인물들은 대부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계열의 유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한일신협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 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일심계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1907년 8월 족질 김용구가 영광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박용근(朴溶根), 오태윤(吳泰允), 이영화(李永華), 정희면(鄭熙冕), 이종택(李鍾宅) 등과 함께 김용구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곧바로 영광읍을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9월 중순 김용구의병부대가 기삼연 의진에 합류한 뒤 9월 24일 전남 서부지역 의진들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하였으며, 도통령에 김용구를, 선봉장에 김준(金準), 중군장에 이철형(李哲衡), 후군장에 이남규(李南奎), 서기 겸 참모에 김봉수(金鳳樹)를 맡겨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조직을 정비한 뒤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기와 군량을 준비하여 군사훈련 등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위정척사적 성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1908년 1월 말까지 항일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곡식의 역외유출 금지를 통해서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방곡과 납세거부투쟁 등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로 장성, 영광, 담양, 고창, 함평, 무장 등 전라도 서부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여 각 읍에 상주해 있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김용구의병부대에 합류한 뒤 1907년 8월 12일 영광읍(靈光邑) 성내(城內)에 이르러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낡은 무기와 적은 인원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화개(花開) 방면으로 이동해 행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화개(花開), 연곡사(蓮谷寺), 남문(南門), 안치(安置) 등지로 이동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과 대청산(大淸山)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10년 사망 때까지의 행적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