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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金玄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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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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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금구(金溝)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금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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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성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5) 전라북도 금구군(金溝郡) 수류면(水流面) 상화리(上禾里, 현 김제시(金堤市) 금산면(金山面) 화율리(禾栗里)) 출신이다. 출생일자는 자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의병활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한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등은 전국적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을 촉발시켰다. 특히 호남의 의병은 세력 규모나 전투력에서 기존 의병과 달라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08년 10월부터 진행된 일제의 의병 탄압 작전으로 인해 호남의 의병 부대는 점차 소규모로 분산되고 국지적인 활동을 하는 유격전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 무렵인 1908년 (음)11월 23일 정성연(鄭聖連, 정성현(鄭聖賢)) 의병 부대에 가담하여 태인·임실·전주·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성연은 이석용(李錫庸)이 이끄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에서 우포장(右砲將)을 지낸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성연은 1908년 말부터 수십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성연과 부대원들은 주로 그의 고향인 금구군과 인접한 임실·태인 일대를 50여 명의 부대원과 함께 빠르게 이동하면서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정성연 의병부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정성연 의병부대는 1909년 2월부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3월에는 정성연이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 의병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의 감시와 추격에 시달려 쫓기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 결과 1909년 6월 19일 태인군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 중에 의병장 정성연이 전사하였고, 5일 뒤인 6월 24일에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4명의 부대원이 사망하면서 부대원이 15~16명으로 줄어들었다. 부대원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지역 주민들에게 군자금과 식량을 징발하는 한편, 일제의 감시를 돕고 정보를 제공하는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7월 21일 소윤명(蘇允明) 등 의병 15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북 임실군 상신덕면(上新德面) 고치리(羔峙里)에서 서경량(徐京良)에게 군자금으로 엽전 55냥을 모집하였다. 10월 6일에는 임실군 하운면(下雲面) 유정리(鍮井里)에서 밀정으로 의심되는 최춘식(崔春植)과 홍문국(洪文國)을 호두산(虎頭山)으로 압송한 후 곤봉으로 징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전개된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인해 호남의 의병들은 더욱 입지가 줄어들었다. 고향에 은신하고 있던 중 1909년 10월 28일 전주경찰서에서 파견한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이후 조사를 받고 전주의 구이동면(九耳洞面) 용동리(龍洞里)의 이태진(李太鎭)의 집에 숨겨 둔 총기 1정이 있다고 실토해 압수당하였다. 1909년 11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0년 8월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신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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