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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봉성

文奉成

1921. 8. 9 ~ 1948.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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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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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聞慶)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문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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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6) 1921년 8월 9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영순면(永順面) 의곡리(蟻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 이명은 문수성(文壽成), 창씨명은 암본복길(岩本福吉)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 별과(別科) 1학년에 입학하여 1938년 본과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39년 3학년 재학 중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중동학교의 영어교사로 있던 김광섭(金珖燮)의 영향을 받아 민족 현실에 눈을 떴다. 김광섭에게 민족차별로 나타나는 ‘내선일체’의 허구성과 한글 과목 폐지로 드러나는 민족말살정책의 본질 등을 교육받으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때 경북 문경 출신으로 안동청년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강원 김화군(金化郡) 농회 지도원으로 있던 권오준(權五峻), 경북 상주 출신으로 배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경동(金敬東), 안동 출신으로 배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해직(李海稙) 등과 교류하며 시국과 민족문제 등의 의견을 나누었다. 1940년 6월 서울에서 김경동의 소개로 경북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 권오직(權五稷)을 만났다. 권오직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을 졸업한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가 1930년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1933년 풀려난 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권오준·김경동·이해직과 함께 권오직을 몇 차례 만나 일제 교육정책의 허구성과 경제정책의 수탈성을 교육받았으며, 자연스럽게 독립의 당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의 현실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동지 규합에 나섰다. 그동안 교류하던 김경동과 함께 한영중학원(漢榮中學院) 3학년 김재수(金在洙) 등을 만나 민족의식을 보전하여 독립에 기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권오준에게도 한국인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사회인식 능력을 배양함과 동시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높여 나갈 것을 제안하였다. 8월에는 같은 학교 학생 이완기(李完基)·서보식(徐輔植)·노영철(盧永哲) 등과 함께 동료 학생들에게 일제의 한국 병탄(倂呑)을 비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지원병이 되는 것은 민족의식을 망각하고 헛된 죽음에 불과하다며 일제가 강제하는 지원병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쟁을 수행할 군사력과 식량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후에도 군사훈련시간에 군사훈련을 비판하면서 동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한편 동지 획득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40년 10월 22일 서울에서 붙잡혔다. 오랫동안 미결 상태로 있다가 1942년 9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2월 29일 풀려났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받은 고문과 오랜 옥고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1948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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