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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경

文同京

1907. 1. 2 ~ 1985.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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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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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求禮)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구례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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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구례청년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907년 1월 2일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구례면(求禮面) 봉동리(鳳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문균(文均)을 사용하였다. 구례공립보통학교(求禮公立普通學校)를 졸업했으며, 일본 도쿄(東京)에 소재한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부터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일본의 한국지배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방학 기간 동안 고향으로 돌아와서 조선일보 구례지국 기자이자 구례청년동맹(求禮靑年同盟)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선태섭(宣太燮)과 함께 논의를 거친 후 청년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로 뜻을 모았다. 1928년 7월 12일 구례청년동맹회관에서 「임시대회를 맞아」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는 “일본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한국청년들은 세계 ‘신흥 계급운동’과 손을 맞잡고 계급 및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왔다, 청년들의 투쟁이 거세짐에 따라 일본 당국은 공산당원을 검거하고 치안유지법을 개악(改惡)하여 탄압을 가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민족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파탄을 맞았다, 하지만 한국 청년들은 일본의 폭압과 착취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상과 같은 취지의 글을 등사판으로 60부 인쇄·배포하였다. 7월 22일에는 선태섭과 함께 구례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된 구례청년동맹임시대회에 참석하였다. 청중 5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청년들이 전개하고 있는 운동들은 반일운동이며, 일본 당국이 청년운동에 어떠한 탄압을 가하더라도 매진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청년운동을 비판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며, 그런 인사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선태섭도 한국청년의 독립운동은 1919년 만세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이 운동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로 대중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반일적이며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글과 연설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곧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28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하지만 검사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28년 12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9년 5월 1일 풀려난 이후, 8월 7일에 열린 구례공립보통학교에 동창회에 참석하였다. 이곳에서도 반일적인 언사를 거침없이 하였다. 공립학교 교장이 조선총독부의 교육 보급과 발전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자, 동아일보 순천지국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정태중(鄭泰重)은 “외국어와 같은 일본어를 국어라고 지칭하며,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 일본어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정태중의 다음 연사로 나서 “일본 정부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 정책을 철폐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 대우를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배척해야 하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일 연설에 대한 소식은 순천경찰서 경찰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또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2개월간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고, 10월 7일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9년 10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0년 6월 17일 만기로 풀려나 1937년 6월 11일까지 동아일보 여수지국 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70년 8월까지 독립촉성회 여수군 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군 단장, 국민회 지부장, 대한노총 여수지구연맹위원장, 자유당 여수시 당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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