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우
南宗祐1878. 8. 6 ~ 1918. 11.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3)
관련 사건
- · 일제토지조사사업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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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3) 1878년 8월 6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정곡면(正谷面) 성황리(城隍里)에서 태어났다. 농민으로 1914년 8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1910년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中橋里) 동쪽 일대의 토지는 정곡면 죽전리(竹田里)·성황리(城隍里)·예둔리(禮屯里)·중교리(中橋里) 등의 주민이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지세를 상납해 온 민유지(民有地)였다. 일제는 이 땅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강제 편입하고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대부(貸付)하였다. 1914년 8월 26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임시토지조사국의 조사원 일행이 안내인 박기양(朴琪陽)과 함께 일제 경찰의 입회하에 해당 토지에 대한 측량을 강행하였다. 토지 측량이 시작되자 주민 수백 명이 토지조사사업의 부당함에 항의하며 현장을 습격하였다. 이때 주민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전중진(田中鎭) 등과 함께 “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압제이므로 방해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시위대와 함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국유대부지(國有貸付地)’라 쓰인 푯말을 철거하고 조사원 일행을 포위하는 등 측량 작업을 중지시키려 했다. 조사원 일행이 나무 기둥 등 측량 장비를 포기하고 인근의 주막으로 도망치자 주막을 포위하고 항의를 계속하였다. 조사원 일행은 의령 읍내로 철수했으나, 다음날인 8월 27일 다시 현장 측량을 강행하였다. 이에 맞서 주민 400여 명과 함께 측량 도구를 탈취하고 가마를 전복시키거나 조사원 일행을 구타하고 진흙과 돌을 던지는 등 토지조사사업을 적극 저지하였다. 특히 주민들은 “우리의 소유지를 국유지라 칭하며 대부를 받았다. 남몰래 극악한 짓을 꾀했다”고 하여 안내인 박기양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그를 난타했다. 이러한 활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및 상해로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고, 1915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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