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寅植
寅植1865. 5. 3 ~ 1928. 4.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협동학교
- · 대한협회 안동지회
- · 교남교육회
- · 경학사
- · 신흥강습소
- · 조선교육회
- · 민립대학
- · 신간회 안동지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82)
관련 사건
- · 을미의병
- · 물산장려운동
- · 형평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2) 1865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주진리(舟津里) 삼산마을에서 아버지 류필영(柳必永)과 어머니 청주 정씨(淸州 鄭氏)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이다. 뒤에 큰집 9촌 아저씨 류기영(柳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고향에서 한학 공부에 전념하던 1893년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과거급제가 청탁과 문벌로 결정되는 부패한 현상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훗날 자신의 저서 『태식록(太息錄)』에서 정부의 부패 중 하나로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문벌의 타파를 강조하는 한편, 유림 부패 현상의 하나로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조정에서 청과 일본에 군대를 요청하여 진압하고자 하자,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처사에 대해 분개하였다. 1985년 일제가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자 이에 분개하여 종형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에서 의병으로 나섰다. 그러나 관군에게 패하자 이후 10여 년간 은둔하며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3년 성균관에 유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이때 신채호(申采浩)와의 만남을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고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자각하며 혁신유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신이 처해 있던 당시를 ‘불행하게도 신구 교체의 시기’라고 파악하고, 세계정세를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대변국(大變局)’으로 진단하였다. 그리고 스승 김도화(金道和)에게 『주역(周易)』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비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수시변역(隨時變易)’을 거론하며 유신(惟新)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김도화는 정재학파의 문인으로서 휘하의 문인이 300여 명에 달하였고, 1895년 안동의병부대의 대장으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또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스승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제와 문생 중 뛰어난 젊은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신학문에 종사하게 하여 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계몽운동가로 전환한 후 끝내 부친으로부터 의절당하고 스승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인간적인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1907년 안동 유림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안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워 교무주임을 맡았다. 교장에 의성 김씨 종손인 김병식(金秉植)을, 학감에 종형인 유창식(柳昌植)을 추대하였다. 교사진은 자신을 포함하여 김동삼·김형식(金衡植) 등 지역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고, 신민회(新民會)가 추천하여 서울에서 내려 보낸 인물들도 참여하였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학교를 기습하여 교사와 학생을 살상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1908년에는 자기 집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유는 “인류의 평화를 부르짖는 시대에 계급의 차별이 있는 것은 인도적 견지에서 볼 때 모순이며 국력 단합에도 해독이 매우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노비를 해방시키고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구분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발해의 옛 땅이 우리들이 돌아갈 곳이라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만주로의 망명은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룡·김동삼·김대락(金大洛) 등 안동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만주 망명을 추진하였다. 1910년 말, 이상룡이 문중을 인솔하여 먼저 출발하고, 이어 이듬해 1월 김동삼을 비롯한 내앞 마을 문중들도 떠났다. 협동학교를 유동태(柳東泰)에게 맡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안동 유림 중 가장 늦게 망명길에 나선 것은 협동학교를 맡아 운영할 적임자를 선발하여 인수인계를 하는 등 후속 처리 때문이었다. 그 후 이회영(李會英)과 이동녕(李東寧) 일행이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다구산(大孤山) 아래 쩌우자가(鄒家街) 일대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이회영 등과 1911년 (음)4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사장에 이상룡을 추대하였고 교무부장 직을 맡았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였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하니허(哈泥河)로 옮겨 중등과정의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1912년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며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귀국 직후인 1912년부터 『대동사(大東史)』 저술에 착수하여 1917년경 일단 초고를 마쳤다. 본서의 수정·보완은 1920년경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반만년의 고유문명을 지닌 역사가 노예사가들에 의해 말살된 현실을 개탄하고, 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을 심어주고 국수(國粹)를 발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924년 겨울에는 『대동시사(大東詩史)』를 저술하였다. 『대동시사』는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 500년간에 걸쳐 302인의 시 445수를 선정하여 편년 순으로 평론을 붙이고 원문을 소개한 것이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가 조직되자, 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商在) 등과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안동지역의 교육운동에 진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1년 9월 『개벽』 15호를 통해 전국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자신이 안동지방을 취재하며 가장 감격한 것은 류인식의 활동이라고 하면서,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통해 그의 협동학교 설립과 운영, 인근 지역의 신교육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기자는 안동의 신학교 건립은 ‘류인식에 의한 신문명 건설운동’이라고 하며, 당시 추진하던 중등학교 건립운동도 소개하였다. 이외에도 안동지역의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지원하였으며, 노동운동에도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안동지회의 설립이 그것이다. 1920년 9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간부와 회원들은 대부분 협동학교 졸업생으로서 안동청년회를 이끌던 인물들이거나, 직접 제자는 아니더라도 함께 교유하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21년 1월에는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과 서신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1923년 1월 서울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위한 조직체가 만들어지고 안동에 그 물결이 밀려오자, 물산장려운동도 이끌어 나갔다. 1923년 3월 29일 개최된 민립대학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 30인 중의 1인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3년에는 형평사(衡平社) 조직에도 간여하였다. 물론 1923년 조직된 형평사 안동분사나 경북 제2지사 설립과 관련하여 자료상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참여 인물 대부분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영향 하에 있던 청년단체나 사회단체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여기에도 간여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1927년에는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될 때, 63세의 나이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안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1920년대 초반까지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운동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간회 안동지회 초대 회장에 추대된 것은 그가 양대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민족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말년에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1927년 겨울에 병석에 누웠으며, 1928년 4월 29일 사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 등은 일제히 그의 사망을 보도하며 애통해 하였다. 안동의 각 사회단체들은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으나 일제가 불허하자 신간회장으로 변경하였다. 5월 21일 엄수된 장례식에 1천여 조문객이 몰렸다. 언론은 이 광경을 ‘예안 초유의 성대한 장례’라고 보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