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秋銀
秋銀1895. 5. 2 ~ 1930. 3.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23인 결사단(決死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5년 5월 2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죽사리(竹紗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천도교인이었다. 창녕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꾸준히 전해오자 천도교인 구중회(具中會)·장진수(張振秀)와 함께 협의하여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야간에 모여 목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리 각지에 연락하여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2일 밤 구중회 집에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점검하였다. 3월 13일 구중회 등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오후 2시경 결사단원들과 함께 만세시위 물품을 지참하고 창녕군 영산면 남산(南山)에서 올라 「결사단원 맹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개춘회(開春會)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모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2일 밤 구중회 집 비밀모임 정보를 입수한 창녕경찰서장은 영산경찰관 주재소에 이들의 동정을 살피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영산주재소 경찰은 남지(南旨)주재소의 지원을 받아 남산 밑 만년교(萬年橋) 부근에 대기하고 있었다. 결사단원과 함께 하산하자 경찰이 막아서며 집회를 금지하였다. 이때 경찰의 총과 칼을 빼앗아 미나리밭에 던지고, 동지들과 함께 몸싸움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품에 숨겨 온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결사단원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징과 북을 울리며 소년행진가를 부르면서 영산면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는 등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하였다. 창녕경찰서가 보낸 경관 1대(隊)에 의하여 구중회, 장진수 등과 함께 붙잡혀 창녕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결사단은 오후 8시경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창녕경찰서로 향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창녕경찰서 앞에서 해산당하였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창녕군에서 경남 영산취성청년회 집행위원, 영산청년회, 영산소작회 상무집행위원, 천도교종리원 시민유지회, 영산면의회 유지회, 창녕군농촌진흥회 등에서 활동하고, 노동야학교, 이재민 구재사업 등에 기부하는 등 지역유지로서 역할을 이어갔다. 1930년 3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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