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헌
金昌憲187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연백군 해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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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연백군 호남면(湖南面) 읍항리(挹抗里)에서 개신교 전도사(耶蘇敎傳道師)로 활동하면서 연백군의 만세시위 준비 단계부터 참여하였다. 서울에 가까웠던 황해도 연백군은 기독교 연결망을 통해 일찍부터 서울의 만세운동에 연계되고 있었다. 특히 연백군의 중심지인 연안읍(延安邑)의 개신교 교회 목사 손창현(孫昌鉉)은 2월 28일 이미 1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지역 내의 전도사와 교인인 홍성환(洪性煥)·장정근(張貞根)·조우삼(趙友三) 등에게 선언서를 배부하면서 배포를 부탁하였다. 이 과정에서 105인 사건의 관련자인 편강렬(片康烈)이 합류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때 개신교 전도사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황해 일원을 계속 주시하였던 일제에 의해 거사가 지체되고, 3월 2일 일부 개신교 인사들이 발각됨으로써 만세시위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연백군 해성면(海城面)의 유지 조종호(趙鍾濩)가 자신의 집을 새로운 의거도모 장소로 제공하면서 연안읍 뿐만 아니라, 해성면 역시 주요한 운동의 거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상대적으로 감시가 적은 연백군 봉북면(鳳北面)에서 3월 15일, 호동면(湖東面) 나진포(羅津浦) 등에서 3월 16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호남면·해성면의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일찍부터 의거 도모의 중심으로 삼았던 해성면을 거점으로 다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조종호·송종대(宋鍾大)와 일신리(日新里)의 정배근(鄭培根)·화양리(華陽里)의 백원빈(白元斌) 등은 면장·면서기·구장 등을 모두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에 기독교 전도사이자, 시위를 주도했던 호남면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연안읍의 장터 개시에 맞추어 이들은 자기 지역의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연안읍성 서문을 통해 시내로 진입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헌병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러나 성내에서도 군중의 호응이 일어나 이에 합류하면서 시위 군중이 2,000여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읍내에서의 만세시위가 활성화되자, 관내 타 지역에서도 같은 날에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해성면 일신리의 만세 군중에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추천으로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연설하였다. 이를 통해 시위 군중의 의기를 고취하면서도 개신교 전도사의 입장에 입각하여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의 정신에 입각해 일본인들의 생명에 난폭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로 민중을 설득하였다. 이후 시위 군중과 함께 연백읍내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였지만, 일제 군경의 진압으로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귀가하였다. 그러나 당일의 시위는 헌병대의 출동으로 인해 연안읍에서도 50여 명이 체포되고 송영택(宋榮澤)을 위시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거사 직후 핵심 인물로 붙잡혀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굴복하지 않고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 해 7월 17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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