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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金志洙

1845. 12. 14 ~ 191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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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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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論山)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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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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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45년 (음)12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 두계리(豆溪里)에서 아버지 김영윤(金永允)과 어머니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심일(心一), 호는 심암(心巖)이다. 11세 때 종숙부(從叔父) 김영학(金永鶴)의 양자가 되었다. 광산 김씨 가문은 1404년 선대 김약채(金若采)가 충남 연산(連山)에 입향(入鄕)하면서 이 지역에 세거하였다. 16대조 김국광(金國光)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11대조 김장생(金長生)이다.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기호학맥(畿湖學脈)의 적통 계승자가 되었고, 조선 예학(禮學)의 종장(宗匠)으로 꼽혔던 인물이었다. 김장생의 학문과 사상은 아들 김집(金集)을 거쳐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으로 계승되었고, 한말 송병선(宋秉璿)으로 이어지면서 일제 침략기에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가풍으로 특별한 사승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나 기호학맥의 적통이자 예학의 종장을 배출한 자신의 가문에 자긍심이 컸고, 학문적 기반도 김장생의 예학에 있었다. 『소학(小學)』, 『가례(家禮)』, 『근사록(近思錄)』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아 공부하면서 스스로 김장생의 예학을 전승하였다. 좌의정을 역임한 송근수(宋近洙)는 “예학의 대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칭송하고 예학의 종주로 추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자결·순국한 송병선은 “덕행과 기량은 사계 선생과 매우 흡사하여 그의 풍모가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며 존중하였다. 스스로의 공부에만 머물지 않고 당대 기호지역 대표적 유학자 김영응(金永膺)·송근수·송병선·송병순(宋秉珣)·송병화(宋炳華)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들은 송시열로부터 계승되었던 기호학맥과 의리사상의 전수자들로 한말 유생들을 규합하여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거한 인물들이었다. 김영응은 족형(族兄)으로 송병선·송병순 형제와 5촌간이었다. 김영응을 통해 송시열의 후손인 대표적 학자 송근수·송병선·송병순과 교유할 수 있었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하였고, 송병순 역시 일제의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며 1912년 자결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영향으로 철저한 존화양이(尊華攘夷)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실천적 의리론(義理論)을 신념으로 삼게 되었다. 제자들에게도 평소 “학자는 반드시 ‘지사(志士)는 죽을 것을 잊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뜻을 세운 뒤에 의리가 중해지고 생사가 가벼운 것을 비교할 줄 알 것이다. 이른바 가난함과 천함, 근심과 슬픈 상황에서도 그 뜻을 어지럽히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며 아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1869년 양성당계(養性堂契)를 조직하고 양성당(논산시 연산면 임리 소재)을 중건하여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 전수하고자 하였다. 양성당은 1602년 김장생이 세운 서재였으며, 그 자리는 김장생 자신이 송익필에게 수학하며 예학의 기초를 닦은 아한정(雅閑亭)이 있던 곳이다. 1870년에는 정회당계(靜會堂契)를 조직하고 정회당(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소재)을 중건하여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지역 유림들을 규합하여 결속을 다지고자 하였다. 정회당은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金繼輝)가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고운사(孤雲寺) 경내에 1557년 세운 서재로, 김장생이 강학하였던 곳이다. 1883년 정회당이 중건됨으로써 김장생의 학문과 예학을 전수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문인 규합 활동과 학문 활동으로 1886년 암행어사 이범조(李範祖)에 의해 관직을 추천받기도 하였다. 1891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받았으나 다음 해 곧 사직하였다. 아들 김용헌(金容憲)이 사망한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이미 이 시기부터 관직에 뜻을 버리고 은둔을 생각한 것이었다. 1905년 중추원(中樞院) 부찬의(副贊議)에 제수되었을 때에도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북향(北向)하여 대성통곡하고 찾아오는 손님도 일체 맞이하지 않으며 두문불출하였다. 일제가 지역의 원로들을 포섭하기 위해 은사금을 지급했고, 1910년 (음)12월 12일 그에게도 은사금이 내려왔다. 이를 엄하게 물리치며 “이 돈이 어찌 나에게 해당하느냐”라고 하며 거부하였다. 가족들에게는 “적이 만약 계속해서 은사금을 보내온다면 틀림없이 내 몸에 누가 있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나의 고결함을 지킬 것을 자처하겠다”라고 자결 의사를 밝히고 집안의 문고와 저술을 정리하여 며느리에게 부탁하였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기 위해 1910년 (음)12월 23일 또다시 은사금을 보내왔다. 그러나 은사금 지급에 실패한 일제는 다음 해 (음)1월 13일 세 번째 은사금을 보내오면서 받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역시 강하게 거부하여 물리쳤다. 급기야 1911년 (음)4월 13일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면 체포하겠다는 협박을 가해왔다. 일제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늙어 죽지 않을 자 몇이나 될까. 이 세상 이 한 몸 살기 어려워라. 청렴한 사람 죽으려는 뜻 빼앗지 못할 터, 단연코 나의 진실함을 바꾸지 않으리라”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죽음을 준비하였다. 사촌동생 김용찬(金容瓚)이 “왜적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치가 자명하지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 조정에서 그랬듯이 겸손하게 말씀하여 거스르지 않는다면 저들도 틀림없이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만류하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충을 위한 것도 아니고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라. 내 몸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려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1월 (음)4월 17일 일제가 체포하려 하자 “내가 병이 심해 약을 먹고 있는 중이니 약을 먹고 나가겠다”라고 둘러대고 방안으로 들어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며느리 박씨가 황망하게 울며 간곡하게 만류하였으나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는 것이 어찌 정도(正道)를 지켜 죽는 것만 하겠느냐. 지금 네가 나를 구하려는 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결국 들보에 목을 매어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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