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회
具男會1901. 7. 3 ~ 1936. 7.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사단
- · 취성청년회
- · 조선청년회연합회
- · 영산소작인회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영산면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901년 7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구남회(具男會)라고도 썼다. 부친은 구종서(具宗書)이고, 창녕군 영산면 3·1운동을 이끈 구중회(具中會)가 친형이다. 영산공립보통학교(靈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경남 창녕군 영산면 3·1만세운동은 구중회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3월 12일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구중회 집에 모여 3월 13일로 예정한 거사를 논의하며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13일 영산면 앞 남산(南山)에 올라 결사적인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결사단원맹세서」에 서명하고 시위운동 비용 갹출에도 동참하였다. 오후 2시경 미리 준비한 구한국기(舊韓國旗)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편, 징과 북을 두드리고 전진가(前進歌)라는 노래를 부르며 영산면 읍내로 들어갔다. 600~700명까지 늘어난 시위대는 오후 6시까지 영산 읍내를 누비면서 시위 행진을 전개한 뒤 다음날을 기약하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급파한 경관 1개 대대가 도착하여 장진수·김추은 등 결사대 중 일부를 체포하여 창녕경찰서에 수감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머지 결사대원들과 함께 긴급모임을 갖고 구속 동지를 탈환하기로 결의하였다. 저녁 8시경 남산에 재차 집결하여 많은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창녕읍으로 행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다른 단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구형무소, 마산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가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원심 검사가 항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영산으로 돌아와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매진하였다. 1920년 1월 장진수·구창서(具昌書) 등 청년들과 함께 천도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과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 6월 2일 구용서(具瑢書)·하만호(河萬浩) 등과 취성청년회(鷲城靑年會)를 결성하였는데, 청년회관 내에 개설한 노동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12월에는 조선 내 여러 청년운동 단체를 규합한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취성청년회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1921년 9월 구중회·구창서 등과 함께 진주경찰서로 연행된 일이 있었는데, 정확한 혐의는 알 수 없으나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그 1주일 전에 귀국하였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가 있다. 1923년 4월 조직된 영산소작인회에서 통상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성회에 장진수 등 4명과 함께 창녕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영산분국 기자로 임용되었다가 1925년 사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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