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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오

金贊五

1874. 12. 19 ~ 197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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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찬오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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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南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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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임실군 둔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74년 12월 19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주천면(朱川面) 송치리(松峙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라북도 임실군(任郡實)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둔남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오수리 유지였던 이기송(李起松)의 주도하에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과 함께 3월 23일 오수리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천도교·기독교 측과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이기송이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한 후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이기우(李起堣)·이춘만(李春萬)·김태순(金泰順)·이영의(李英儀)·이송의(李松儀)·심상룡(沈尙龍)·이정의(李正儀)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과 더불어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시위를 진압하는 한편 이기송을 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이기송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위협을 받은 주재소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邑次)가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기송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시위대와 함께 시장과 면사무소를 지나며 시위 행진을 지속하였다. 행진 과정에서 일본인 상점을 파괴했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유치장을 부수고 감금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저녁 무렵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병력이 출동해 발포하자 시위대는 사상자를 내고 해산했다.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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