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찬선

金贊善

1898. 9. 10 ~ 1968. 3. 1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찬선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남 창원(昌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창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8년 9월 10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창원면(昌原面) 중동리(中洞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로 이주하여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창녕군 영산지역에 전파된 천도교를 받아들였다.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산면 만세시위는 영산면 출신인 구중회(具中會)가 서울에서 내려와 지역 청년들과 천도교 신자를 규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찬동하여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만세시위 준비에 가담하였다. 이들과 함께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독립만세’ 깃발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2일 밤 23명의 주도 인물들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했다. 조직 이후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삼장을 내용으로 하는 선서문을 채택하고 구체적인 투쟁 방법을 논의하였다. 다음날 3월 13일 오후 1시경 결사 단원들과 함께 영산면 남산(南山)에 집결하여 “독립주권국을 싸워서 얻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투쟁한다”는 결사 단원 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에 서명하였다. 서명 이후 2시경부터 품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큰 북과 징을 울리며 독립만세와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며 영산면내로 행진하였다. 600~7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영산면을 누비며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으며, 시위대의 일부는 영산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하고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저녁이 되자 다음날을 기약하며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으나, 창녕경찰서에서 급파된 경관 1개 대대가 구중회·장진수·김추은 등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나머지 결사 단원과 함께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창녕경찰서로 돌입하였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