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홍
金澤鴻187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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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평안남도 평양군(平壤郡) 대찰면(大察面)에서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40세였던 것로 보아 18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에는 월자(月子, 여자들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 넣었던 딴 머리. ‘다리’라고도 함)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평양의 만세시위는 세 곳에서 시작되어 가두에서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당시 평양에서 제일 큰 교회이던 장로교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앞마당인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는 장로교인들이, 광성학교(光成學校) 근처 감리교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뜰에서는 감리교인들이, 그리고 설암리(薛岩里) 근처 옛 대성학교(大成學校) 뒷 터에 자리한 천도교 평양대교구에서는 천도교인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같은 날 세 방면에서 시가 행진이 시작되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 행렬이 점점 불어났다. 상인들은 장사를 중단하고 시위에 가담하였다.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평양 천도대교구에서 집회를 마치고 나온 천도교인들과 합류하여 남문거리 평양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시위대가 경찰서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경찰과 헌병들은 경찰서 건물을 앞뒤에서 막고 기마대를 내세워 시위대를 몰아냈다. 이때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시위 행렬이 합류하면서 일본인 거리인 신시가지로 나아갔다. 여기서 다시 한 갈래는 평양남도 도청과 재판소 앞 큰 거리를 누비며 평양역 광장까지 나아갔고, 다른 한 갈래는 평양부청(平壤府廳) 옆과 일본인 중학교 옆을 거쳐 평양형무소 뒷거리와 서성리(西城里), 서문 밖 큰 거리를 돌았다. 이날 저녁 7시 무렵에는 낮보다 배가 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이 소방대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시위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 경찰서 건너편 식산은행 현관 앞 높은 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이미 독립한 것이니 일본놈을 크게 학대해야 한다. 경찰이 발포하더라도 결코 물러서서는 안된다”라는 취지로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경찰서 창문이 시위대로부터 날아온 돌에 깨지자 경찰은 즉시 발포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과 난투극을 벌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주도자 체포가 시작되어 3월 8일까지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때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고 경찰을 폭행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요로 징역 1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나라의 독립 자유를 유지함은 천명이다. 그 자유를 잃고 그 독립 자유를 회복하려 함은 사람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고 무죄임을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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