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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金泰隱

187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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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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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중화(中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중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5)

관련 사건

  • · 중화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5)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풍동면(楓洞面) 복정리(福井里) 출신이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에 당시 나이가 43세인 점으로 미루어 1877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3일 평남 중화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일 중화군에는 전날인 3월 1일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였다. 3월 2일 아침 시위대는 신읍리(新邑里) 상원경찰관주재소(祥原警察官駐在所)로 이동하였다. 시위대는 주재소의 철거를 요구하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 해산을 명령하자, 시위대는 일제히 그들을 공격하여 주재소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주재소 안에 보관 중이었던 총기와 탄약을 들고 나왔다. 시위대의 시위는 마침 이곳에 와있던 상원경찰서장을 납치할 정도로 격렬하였다. 이에 평양에서 시위대 진압을 위해 일본군과 경찰이 파견되었다. 이들 일본군과 경찰은 시위대가 가져간 총기와 탄약을 회수하고, 시위대 39명을 체포하였다. 다음 날인 3월 3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시위대는 오후 2시경부터 체포자의 석방을 위해 주재소를 다시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백병전이 발생하였고, 일부 시위대가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오후 4시경에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시위대가 시내를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 시위대는 일본군과 충돌하여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다른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반만년 역사를 지닌 당당한 조선 민족으로서 병합 후 항상 독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세계의 대세이며, 조선 민족의 의무를 드러내기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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