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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金永奎

1924. 11. 1 ~ 199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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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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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山淸)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산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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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4년 11월 1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금서면(今西面) 주상리(舟上里)에서 태어났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39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에는 금산영규金山永奎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사립학교인 교토중학교에 입학해 1942년 3월에 3학년을 수료하였다. 재학 중 일본인에게 모멸적인 발언을 듣는 등 민족 차별 경험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나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41년 5월부터 1942년 10월 일본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교토중학교 교내 또는 하숙집에서 뜻을 함께하는 학생들과 수차례 모여 동지 모집과 활동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1941년 5월 김헌술(金憲述)과 함께 일제의 민족 차별을 비판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결연히 나서자고 약속하였다. 6월과 9월에도 회합하고 각자 독립운동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일본과 무력항쟁에도 대비해 군사교련 습득에도 힘쓰기로 다짐하였다. 1942년 2월 한인 유학생과 재일동포 사회에 민족의식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독립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인도의 독립운동 경과를 연구하고 불복종운동을 본받아 일본에 대해 불복종운동을 전개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징병제 실시에 따라 다수의 한인이 전쟁터에 동원될 것이므로 자신들도 징병되면 기회를 보아 한인 병사의 연합군 투항을 유도하거나 첩보 임무 등을 주어 일본이 패전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계획도 세웠다. 1941년 11월부터는 여러 차례 한인 유학생 동지들과 회합하며 민족의식 고양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김덕룡(金德龍) 등 여러 학우와 모여 일본의 통치제도와 민족차별, 지원병제도를 비판하였다. 특히 지원병제도는 사실상 강제동원이며 민족 번영이 아닌 일본을 위한 지원은 의미가 없다고 발언하였다. 현재의 비참한 상황은 나라를 잃은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며 독립 운동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민족차별은 일왕의 뜻이므로 일왕에 대한 존경심을 포기시켜야 하고, 일왕에 대한 숭배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며 일왕의 무능력을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1942년 10월 7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43년 2월 4일에 기소되어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오사카(大阪)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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