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泰東
泰東1897. 11. 27 ~ 1982. 9.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3)
관련 사건
- · 진주군 진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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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3) 1897년 11월 2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 낙평리(洛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상남도 진주군(晉州郡) 진주면(晉州面) 평안동(平安洞)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초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진주면의 유지들은 비밀 회합을 거듭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면서, 인근 각 면의 유지와 대중을 규합해나갔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일본 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 지역 출신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에게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권채근(權采根) 등 주도 인물들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거사일을 3월 18일 진주읍 장날로 정하고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광림학교(光林學校)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이들이 주악을 담당하기로 하고, 주도 인물들은 기독교회 측과 각 사회단체를 담당하여 교섭을 맡아 군중 동원에 나섰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주도 인물들이 연설에 나서면서 나팔소리를 신호로 4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시위 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날 시위에 참여하여 오후 1시경부터 태극기와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였다. 학생들도 감추어둔 태극기를 대중에게 나누어주고 수천 명의 시위 군중과 학생이 모였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제지할 수 없자 소방대까지 동원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진압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 군중의 대열이 경남도청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는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저녁 무렵 일본 헌병과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를실시하여 3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주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21일까지 4일간 지속되었다. 1919년 3월 18일에 일어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같은 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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