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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金永熙

1895. 4. 27 ~ 192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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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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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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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5년 4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희경(金熙敬)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성군 원곡면에서는 1919년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각 마을의 주민들이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는 내가천리(內加川里)에 거주하는 이덕순(李德順)이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이때 인접한 칠곡리와 지문리(芝文里) 주민 수십 명도 면사무소로 와서 함께 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는 3월 31일까지 지속되었는데, 31일에는 시위대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났다. 1919년 4월 1일 밤 8시경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최은식(崔殷植) 등의 주도로 원곡면 각 마을의 주민 약 1,000명이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와 횃불을 들고 인접한 양성면(陽城面) 동항리(東恒里)로 이동하였다. 돌과 몽둥이 등을 휴대한 시위대는 두 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서 만세운동을 독려하는 연설을 듣고 바로 동항리로 들어갔다. 한편 동항리에서는 그날 밤 9시경부터 양성경찰관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양성면민 수백 명이 밤 9시 50분경 자진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때 양성면에 도착한 원곡면의 시위대가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밤 10시경 약 2,000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양성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해 만세를 부르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맨 앞에서 주재소에 돌을 던졌고, 다른 참가자들도 몽둥이를 휘두르며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재소의 사무실과 기숙사의 유리창, 벽 등이 파손되었으며 여러 문서와 기물들이 불태워졌다. 시위 군중들은 이어 양성우편소로 이동해 부근의 전신주를 부수고 전화선을 절단했으며, 안으로 들어가 전화기·가구·서류·물품 등을 파손하였다. 그리고 주변의 일본인 대금업자와 잡화상의 집을 불태웠다. 이에 일제 경찰이 총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 원곡면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로 몰려가서, 김순서(金順西)·김중식(金重植)·한재호(韓在鎬)·김필연(金必然) 등과 함께 숙직실에 불을 지르고 서류와 물품을 전부 불태웠다. 하지만 이날 시위대 가운데 5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안성경찰서에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이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하였고, 그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은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주거 침입, 강도, 소요, 전신법 위반 등으로 공소 불수리 판결을 내렸다. 결국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로 징역 7년(구류 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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