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서
金永西1889. 10. 17 ~ 1959. 6.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9년 10월 1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재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광오(金光五)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경기도 안성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1910년 2월까지 충북 옥천군에서 군서기관을 지냈다. 1910년 2월 14일 대한제국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안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읍내에서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합동 만세시위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날 오후 8시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양성면의 동항리(東恒里)로 이동하였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양성면의 시위대는 밤 9시경 양성경찰관주재소(陽城警察官駐在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밤 9시 50분 양성면의 시위대가 자진 해산하고 귀가하려고 할 때, 원곡면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동항리에 도착하였다. 밤 10시경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 군중은 다시 주재소 앞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이유석·남현서(南玄西)·조경수(趙慶洙)·김봉현(金鳳鉉) 등과 함께 앞으로 나가 시위대를 독려하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주재소의 여러 기구와 문서, 건물 등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로 이동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부근의 전신주 등을 파괴하였으며, 내부의 기물과 서류 등도 불태웠다. 그러다 일본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하였다. 원곡·양성면의 격렬한 만세 시위로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피신 상태에서 헌병대의 야간 수색과 갖은 방법에도 붙잡히지 않았다. 헌병대는 원곡면장에게 농사철이므로 경찰서장의 연설을 들으면 모두 사면해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겠다고 회유하였다. 이 말을 믿고 당일 지정된 장소로 나갔지만, 일제 헌병대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포위한 채 총칼로 위협하고 몽둥이로 폭행을 가했는데, 이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로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하였고,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은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주거 침입, 강도, 소요, 전신법 위반 등 혐의로 본건 공소 불수리 판결을 내렸다. 결국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7년(구류 일수 중 500일을 본형에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풀려난 후 1929년 2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31년 2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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