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세극
南世極1882 ~ 194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간민회
- · 대한국민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6) 본적은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고면(下古面)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88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만주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지신사(智新社)에서 거주하였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이명은 남군명(南君明)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남군성·남군필의 형제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고 남사열(南仕烈)을 막내아들로 두었다. 신민회(新民會)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간민회(墾民會)·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1906년 만주지역 최초의 민족학교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교육받았다. 서전서숙은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이명 (呂祖鉉))·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애국지사들이 1906년에 간도 룽징촌(龍井村)에서 최병익(崔秉翼) 소유의 신축 가옥을 매수하여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그곳에서 윤정희(尹政熙)·이병징(李丙徵)·윤규한(尹圭漢)·김정문(金鼎汶) 등과 함께 갑반에 속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신교육을 받고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후 신민회의 합법적 결사인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무원(庶務員)을 맡았다. 신민회는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지방연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1910년 3월 12일 서울에 한성연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뺏기자 청년학우회도 신민회와 마찬가지로 힘을 잃게 되어 한성연회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1913년 간민회에 참여하여 허룽현(和龍縣) 태랍자(太拉子) 지역 평의원을 맡았다. 1919년에는 김약연(金躍淵)·구춘선(具春先) 등과 더불어 재남북만주조선민족대표 17인 중 1인으로 「조선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룽징에서 3·13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5월 『대한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만주지역 한인 학교에 배포하였다. 5월 14일에는 허룽현 태랍자의 방에서 마진(馬晉)·유하천(柳河天) 등 10여 명과 함께 첫째, 국민의회 간도지부 보조기관으로 간도에 ‘신국민단(新國民團)’을 조직하고, 둘째, 신국민단에 단장과 자치위원을 설치하여 간도 재주 한민족 간의 계쟁사건을 중재하도록 하며, 셋째, 신국민단장 이하 각 위원에게는 국민의회 간도지부에서 위임장을 교부할 것 등을 논의하고 마진을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1919년 10월,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노령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마진·구춘선·최기학(崔起鶴)·김석관(金錫寬) 등과 함께 명동촌(明東村) 대랍자(大拉子)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일제의 조사를 따르면 1919년 12월 18일 당시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남부지방총회(南部地方總會)에서 재무를 맡았으나,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동학교 교사였던 최기학에게 그 업무를 대신 맡도록 하였다. 1920년 1월 일제가 파악한 대한국민회의 조직 상황에 따르면 다시 대한국민회에서 재무를 맡고 있었다. 1920년 3월에도 북간도 지역 공교도들을 중심으로 왕칭현(汪淸縣)에 근거지를 두고 조직한 대한광복단에서 재무부장을 맡았다.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에서도 간부로 참여하여 서무부장을 맡았다. 1923년 2월에는 대한국민회 대표로 마진 등과 더불어 적기단(赤旗團) 회의에서 독립투쟁 방법을 논의하였다. 1928년 2월 10일에도 사저에서 각사회단체연합선후회(各社會團體聯合先後會)를 개최하여, 간도 룽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동만청년총동맹(東滿靑年總同盟)·용정청년연맹(龍井靑年聯盟)·간민교육연구회(墾民敎育硏究會) 등과 함께 간도지역 학교 문제를 논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은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