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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京瑞

京瑞

1877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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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羅京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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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8)

관련 사건

  • · 북간도 3.1운동 시 시건평(時建坪) 만세시위
  • · 간도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8) 출생지와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상 알기 어렵다. 일제가 1921년 4월에 작성한 「간도방면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의 조직 및 역원(役員)조사서(調査書)」에 의하면 1920년 10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전후한 시기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동부지방회(東部地方會) 사교부장(社交部長)직을 수행하였다.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되자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해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망명 초기인 1900년대에는 2세를 위한 민족교육기관을 세우고, 이주한인의 생활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준비할 자치기관인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설립하였다. 이 자치회는 이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 간민회(墾民會) 등으로 명칭을 바꾸며 이주 한인사회를 이끌고, 침략자 일제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19년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지역의 한인들을 일깨워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더욱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성립시켰다. 기성회는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직할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천명하고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변경하였다. 대한국민회는 성립 초기 옌지현(延吉縣) 춘양향(春陽鄕) 하마탕(蛤蟆塘)에 본부를 두고 북간도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동·서·남·북·중의 5개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이들 중 옌지현 지인향(志仁鄕) 화령촌(花嶺村)에 설치된 동부지방회는 양도헌(梁道憲)이 회장에 선임되었고, 이때 사교부장에 임명되었다. 그에 앞서 김은산(金銀山)이란 인물이 사교부장이었으나 변절하자 그 직을 대신했던 것이다. 북간도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의 북쪽에 있는 넓은 들판인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시작되었다. 북간도 전지역에서 약 3만 명의 한인들이 운집해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시위대를 형성해 침략자 일제를 물리치기위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시위는 순식간에 북간도 전역으로 퍼졌고, 동부지방회 사교부장의 자격으로 군중을 이끈 화룡현(和龍縣) 청하사(晴霞社) 시건평(時建坪)의 만세시위는 4월 2일 전개되었다. 약 8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화룡현에 설치된 일제 기관들을 돌며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이러한 활동으로 자연히 북간도 한인사회를 이끌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일제에게 지목되었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서북간도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민족운동가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따라서 10여 년간 준비해오던 무장활동에 대한 역량을 총집결해 독립군단(獨立軍團)을 편성했다. 북간도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이 성립되고, 대한국민회에서도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조직하였다. 이들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들은 두만강을 넘어 한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한국인을 처단하였다. 독립군들의 활동에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8월 서북간도의 독립군과 배일한인(排日韓人)을 대규모 무력적 공격으로 소멸시키고자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일제는 이 계획을 실행코자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 1920년 10월 2일 훈춘(琿春)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토록 해 허위 피해를 만든 뒤, 이를 구실로 대규모 병력을 서북간도로 침략시켰다. 이 ‘훈춘사건(琿春事件)’을 빌미로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들이 서북간도를 침략해 왔다. 일본군들은 독립군병영은 물론이고 한인의 가옥·학교·교회 등을 보이는 대로 방화하고, 한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총칼로 살해하였다. 그 결과 3천 7백명에 가까운 한인이 피살되고, 3천 3백 채가 넘는 가옥과 학교·교회가 소실되었다. 이 같은 피해 중 대한국민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연길현과 이 기간 중 만주 독립군의 항일투쟁사 중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청산리전투이 전개되었던 화룡현의 피해가 가장 컸다. 화룡현의 경우 362채의 가옥, 15개교의 민족학교, 2개의 한인교회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670명의 민족운동가나 한인들이 살해당하였다. 이때 대한국민회 동부지방회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해 일시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시기 중국측이 작성한 「핵정간민사자휼금수목급매장비일람표(核定墾民死者卹金數目及埋葬費一覽表)」에 43세의 나경서(羅京瑞)가 일본군에게 희생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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