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록
金熙祿1888. 1. 2 ~ 19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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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1) 1888년 1월 2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부남면(府南面, 부라면으로 개칭) 백현동(栢峴洞)에서 태어났다. 가정 배경이나 유년시절 수학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 상 알 수 없다. 다만 직업이 ‘금전대차(金錢貸借) 중개업(仲介業)’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추정된다. 독립운동 참여는 감익룡(甘翊龍)과 김용규(金容奎)의 집에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11월 경술국치 이후 감익룡은 김용규, 김용규의 친척 김용삼(金容參) 등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립운동 계획을 제안하였다. 다수의 한인 청년을 북경무관학교(北京武官學校)에 입학시키고, 졸업한 이들을 중심으로 서간도(西間島)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서간도에 설립한 무관학교에 입학한 청년들에게 군사교육과 민족의식을 함양시켜 일본과의 일전(一戰)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자는 것이 감익룡의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날 모인 인사들과 함께 한인 청년들을 북경무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또한 중국과의 교통 요충지인 안둥현(安東縣)으로 이주하여 상업을 통해서 자금을 확보하자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북경무관학교에 입학시킬 학생들을 모집하자는 것에도 의견일치를 보았다. 김용삼, 김성주(金成柱)와 함께 안둥현에서의 상업 경영에 필요한 자금 200원을 출자하였다. 곧이어 안둥현으로 이주하였고, 상업 활동을 통해서 독립운동 자금과 기지 마련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을 탐지하고 있었던 일제 경찰에 의해 1911년 1월 붙잡혔고,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의 일원으로 재판을 받았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1912년 1월 19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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