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종
金孝宗1900 ~ 1927. 12.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황해도 재령 북율소작쟁의
- · 한양청년연맹
- · 조선공산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900년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본적은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율면(北栗面) 석해리(石海里)이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20년 9월 북율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농감 최용근(崔龍根)에게 독립군자금을 청구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황해도 지역을 대표하는 농민운동가로서 농민들의 권익 확보에 힘쓰는 한편, 1920년대 중반 반제국주의 사회단체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9월에 동아일보 사리원지국 남호분국(藍湖分局)을 설치하였는데 분국장은 류찬혁(柳讚赫)이 담당하였고, 분국 기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재령군 북률면의 소작쟁의에 참여하며 소작인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재령은 비옥한 곡창지대인 만큼 일제에 의한 농민 수탈도 가혹한 곳이었다. 특히 1924년에는 수해와 병충해로 인한 흉작이 들었음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일명 동척)가 이를 감안하지 않고 소작료를 징수하자 농민들이 크게 들고 일어섰다. 소작농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고 동척 사리원점에 몰려가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으나, 동척은 이를 거부하였다. 북율의 소작농들은 끊임없이 동척에 항의를 이어가며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농민들을 강제로 붙잡았고, 급기야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 이민자들이 농민들을 겁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들은 호미와 낫을 들고 맞서 싸웠으며, 결국 북률의 소작쟁의는 더욱 격화되어 전국적 사건으로 주목되었다. 1925년 초 소작농들은 북율소작인조합(北栗小作人組合)을 결성하여 단체행동에 나서는 한편, 서울의 동척 본사에 소작쟁의 대표 최윤행(崔允行), 이기홍(李基洪)을 파견하여 고문 이규완(李圭完), 이사대리 시무라(志村) 등과 교섭하기도 하였다. 이때 집행의원으로서 소작인조합 창립을 주도하였다. 1925년 5월에는 북율소작쟁의 해결을 위해 소작조합 교섭대표로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을 방문하는 활동도 담당하였다. 이어 1925년 5월 19일 북율면 청년들을 조직하여 남우리 청년동맹을 창립하고 위원이 되었다. 1925년 3월 북율소작인조합은 소작 권리 확보, 소작료 4할제 실시, 중간 소작과 마름 철폐, 일본인 이민 반대 등을 결의하는 한편,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가입을 결정하였다. 이에 소작인조합을 대표하여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조직된 서울·고양(高陽) 지역 청년단체의 연합조직인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식민지조선의 경제적 사정을 통계적으로 조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경기도청년연맹(京畿道靑年聯盟)에도 참여하였다. 식민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인식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1926년 4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그리고 정우회(政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몰아닥친 일제의 대규모 검거작전으로 인해 경찰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26년 12월 해주지방법원 재령지청에서 징역 6월을 받고 판결에 불복하여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하였지만 복심법원의 판결은 확인되지 않는다. 해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 등을 오가면서 재판을 받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1927년 12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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