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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룡

金彩龍

1921. 6. 6 ~ 2008.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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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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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光陽)국내항일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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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백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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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21년 6월 6일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인동리(仁東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금강채룡(金岡彩龍, 가네오카 사이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36년 3월 광양공립소학교(光陽公立小學校) 고등과 1학년을 수료하고, 4월 일본광업개발주식회사(日本鑛業開發株式會社) 전라남도 광양광업소에서 근무하였다. 1941년 2월 초순 광양광업소 제3합숙소에서 동료 김원주(金原柱)에게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內鮮一體)는 거짓말로 “회사에서도 조선인에 대해서는 심한 차별 대우를 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슬픈 경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조선인의 조선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1년 3월 초순 다시 김원주에게 “현재 왕성하게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있지만, 이는 조선 민중을 기만하려는 정책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민족(異民族)의 융합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들의 행복은 조선인의 조선을 재건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4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우리 조선 청년은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청년이 짊어진 사명이다. 조선 독립을 위해 우리 청년들 모두의 사명으로 조선 독립을 위해 힘차게 일어서서 동지를 획득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원주 역시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3월 16일 자신의 집에서 김원주와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한 결과, 독립하기 위해서는 신념을 강화해야 하고, 민족운동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학문 외에 영웅전(英雄傳), 사상 서적 등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공감하였다. 또한 기독교를 중심으로 민족의 규합·단결을 도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1941년 5월 중순 제3합숙소에서 동료 오호영(吳浩榮)에게 기독교를 중심으로 민족을 규합하여 조선인의 조선을 재건해야 한다고 말하자, 오호영도 동의하였다. 이후에도 회사내의 민족차별문제,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성, 일제 식민지배의 착취 문제를 비판하면서 독립을 위해 함께 저항할 동료들을 규합해 나갔다. 같은 해 6월에 광양광업소를 그만 두고, 8월 하순 학업을 목적으로 일본 교토(京都)로 가서 교토기독교청년회(京都基督敎靑年會) 야간중학부에 편입하였다. 9월 8일 ‘전북 김제군(金堤郡) 월촌면(月村面) 신월리(新月里) 199번지 김원주’ 앞으로 “이광수(李光洙)의 「인생의 향기」는 우리 민족이 취해야 할 것으로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한번은 읽어봐야 한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또한 조선에 있는 동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을 위한 실행사항들을 협의하던 중 1941년 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11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상고하였다. 1943년 1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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