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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운

金致雲

1864. 3. 1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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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치운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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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大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대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대구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1) 1864년 3월 12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남산정(南山町)에서 태어났다. 1919년 대구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대구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시위를 시초로 한다. 서문시장의 만세시위는 대구는 물론 영남 지방 만세운동의 효시를 이루는 것으로, 이후 이 지역 만세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만세시위 준비는 이미 2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1919년 2월 24일 밤 대구 남산정 교회에서 목사 이만집(李萬集), 조사(助事) 김태련(金兌鍊),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3월 1일 만세운동이 점화되고, 이갑성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을 통해 독립선언서 200매를 전달해 오자, 대구에서도 만세운동 동참을 결의하였다. 거사 일시는 3월 8일 오후 3시로 결정되었다. 거사 당일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만집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상황이 급박하여 독립선언서를 끝까지 읽지는 못했으나 서문시장에 모인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하였다.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 학생과 기독교인, 장을 보러 온 군중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의 시위 행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위대는 무장한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을 받고 해산되었다. 만세시위는 이틀 뒤 재개되었다. 3월 10일은 남문 밖 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을 비롯한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오후 4시경부터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탄압으로 또다시 65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오후 5시경 모두 해산되었다. 이날 남문 밖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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