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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명

金致明

1883. 1. 1 ~ 197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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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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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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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의성군 봉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1883년 1월 1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괴산동(槐山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치민(金致民)이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안평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참가하여 군중을 이끌었다. 안평면에서는 대사동(大司洞) 우리골(尤利谷)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 대사동교회 영수였던 김옥돈(金玉頓)과 이종출(李鍾出)·이화실(李華實) 등이 60~70명의 교인과 주민을 모아 1919년 3월 15일 저녁 7시경에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분위기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시위 규모는 전날과 비슷한 50~60명이었지만, 시위 현장은 마을 뒷산에서 주재소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3월 17일에도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때는 보다 규모가 커져서 4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3월 18일에도 300여 명 규모의 시위대가 안평면 곳곳을 행진하는 형식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9일에는 봉양면 도리원(桃李院)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은 도리원 시장 장날이었는데, 김옥돈과 이종출 등은 이 점에 착안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아 의성경찰서까지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결과 1,000명 규모의 시위 대열이 형성되었다. 이때 시위대 선두에 서서 몽둥이와 돌로 주재소의 담벼락을 부수며 주재소 진입을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의 강력한 제지로 의성경찰서 진입은 실패하였지만, 이날 시위는 인근 지역 만세운동의 절정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로 인해 일제에 붙잡혀 1919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6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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