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
金就礪1876. 3. 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용강군 해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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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6년 3월 9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해운면(海雲面) 일병리(日屛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용강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대금업(貸金業)에 종사하고 있었다. 3월 1일에 진남포에 들렀다가 오후 2시에 시작된 만세시위를 보고, 여기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용강군의 만세시위는 3월 초순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용강면과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서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장날을 이용하여 기독교회나 천도교구가 있거나 기독교인이나 천도교인이 많은 동네 곳곳에서 열렸다. 지운면의 만세 시위에 이어 3월 4일에는 서화면(瑞和面)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6일에는 해운면 온정리(溫井里)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용반(龍磻) 1리 마을 사람 70여 명이 김정식(金正植)과 김태웅(金泰熊) 등의 주도하에 독립만세를 부르며 온정리를 향해 행진하였다. 김정식은 3월 6일 용반리 서당에서 김태웅 등과 모여 평양의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들은 서당 생도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용반 2리에 있는 서당으로 몰려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네 주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약 50여 명을 이룬 시위대는 궁산리(弓山里), 일병리 등을 거쳐 온정리 시내로 들어가서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순 뒤 일단 후퇴하였다. 이때 온정리 시장에 있는 이승흡(李承洽)의 집에서 사무를 보던 중 만세 시위를 보고 이에 동참하였다가 붙잡혀 기소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진남포지청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조선인으로서 조선 독립이라는 말을 듣고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중죄이냐”고 항변하며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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