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燦興
燦興1874. 3. 24 ~ 1943. 9.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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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74년 3월 24일 평안남도 평양군(平壤郡) 상수리(上需里)에서 태어났다. 평양 이향리교회(履鄕里敎會) 목사로서 평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양은 조선시대 감영 소재지로서 평안도의 중심지였다. 서구 문물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서울과 함께 서양 교육과 문화가 제일 먼저 들어와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동시에 진행된 평양의 만세시위는 세 부류에서 시작되어 가두에서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천도교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각자 독립선언식을 진행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감리교 측 평양 이향리교회 목사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15일 이승훈(李昇薰)·길선주(吉善宙) 목사 등과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3월 1일 평양의 감리교인들과 함께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에 집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독립선언식 사회를 주관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한편 평양의 장로교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에 집회를 시작하였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치른다는 명목 하에 교인들은 숭덕학교 교정에 모였다.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봉도식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끝났다. 이때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다. 이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연설이 이어졌으며 애국가도 함께 불렀다. 숭덕학교 교사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경찰의 해산 요구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종로 큰 거리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평양 천도대교구 집회는 서울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고 준비한 것이었다. 2월 하순에 평양에서 대교구장이 모여 계획하고 2월 28일 오후에는 천도교 선천대교구장인 김상열(金商說)로부터 평양역에서 천도교중앙총부가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평양대교구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기독교에 약 7,500장을 보내고 남은 것은 산하 교구에 밀송하였다. 천도교인들 역시 3월 1일 고종의 봉도식을 구실로 모여 집회를 한 후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처럼 평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유로 붙잡혀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이제 설풍혹한의 무력시대가 지나가고 춘풍화기와 같은 공의정도(公義正道)의 시대가 열려 동양에 영원한 평화가 도래하였다는 인식 하에 양심의 사명으로 거사를 하게 된 것인 바, 누가 자기의 생존을 타인에게 맡길 자가 있느냐”고 항변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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