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周翰
周翰1875. 11. 7 ~ 1947. 6.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1)
관련 사건
- · 청도군 운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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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1) 1875년 11월 7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신원동(新院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며 솥을 제작하는 주물 공장에서도 일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중순이 되자 경북의 여러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청도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매전면(梅田面) 장연동(長淵洞)의 김집이(金集伊)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5월 7일의 ‘일본인 구타 의거’까지 다양한 형태의 시위가 일어났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20·30대가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신식학교의 교사와 학생, 교회 관계자 등으로 각 지역에서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운문면에서는 문명학교(文明學校) 졸업생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으켰다. 3월 10일 처음으로 만세운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3월 15일에는 손기현(孫琪鉉)·김재화(金在華)가 “우리 동포 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리 강토를 탈환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방음(芳音)·대천(大川)·순지(蓴池)·오진(梧津) 등지에 붙이면서 시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3월 17일에도 김상구(金相久)·김진효(金鎭孝)·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 등이 문명학교에 모여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3월 18일에는 격문을 붙인 혐의 때문에 주재소로 소환되었는데, 조사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시위는 운문면사무소에서 본격화되었다. 김진효 등은 면장 이영호(李永浩)의 집을 향해 행진하는 등 마을 곳곳을 누비며 만세를 외쳤다. 운문면의 만세운동은 대천리와 공암리(孔岩里) 등의 주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천리의 박정찬(朴廷瓚)·박재영(朴在永) 등이 이에 감응하였고, 공암리의 박영묵(朴永默)·김문근(金文根)·최성희(崔聖熙) 등도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주도자에 대한 일본 경찰의 체포는 3월 19일부터 시작되었다. 시위 주도자들이 잇달아 붙잡혀 끌려갔다. 김성삼(金聖三)이 공동 주물공장에 소식을 전하자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순사를 잡아당기며 제지하였다. 일경이 “놓지 않으면 소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했지만, “총을 쏘더라도 놓지 않겠다”고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순사가 도주한 후 자신의 의복에 탄환이 명중되어 있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및 공무집행방해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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