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
金鍾煥187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관련 사건
- · 성천군 성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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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8) 1872년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삼흥면(三興面) 일청리(一淸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48세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평안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성천군의 독립만세시위는 천도교계에 의해 주도되었다. 성천에서는 기독교세보다 천도교세가 더 컸다. 1910년대 천도교의 교세가 가파르게 상승하였는데, 성천에서도 천도교인이 급속히 늘어나 10,000여 명을 헤아렸다. 쌍룡면(雙龍面) 상평리(上坪里) 출신의 천도교 성천대교구장인 이돈하(李燉夏)는 1919년 2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대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가 김상열(金商說)을 통해 보낸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평양대교구 간부인 김수옥(金守玉)에게서 받았다. 이돈하는 3월 1일에 성천으로 돌아와 천도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4일 오전 11시 천도교 성천대교구 앞에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4,000여 명이 넘는 시위군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는데, 먼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시위대는 거리에 나서 성천면 상부리(上部里)에 있는 헌병대로 몰려갔다. 헌병대 정문에서 기다리던 헌병과 헌병보조원 10여 명이 일렬로 서 있다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 그 자리에서만 28명이 희생되었고 최인각(崔仁珏) 등 7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조선 민족이 함께 만세를 외쳐 이에 호응한 것은 국민의 의무를 행한 것 뿐”이라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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