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태
金演台1879. 3. 2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김화군 기오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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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기오면(岐梧面) 창도리(昌道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9년 3월생으로 추정되며, 1919년 당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김화군에서는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기획되었으나 대부분은 일제의 예비검속 또는 「독립선언서」 살포 단계에서 발각되어 직접적인 시위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기오면사무소의 소재지였던 창도리(昌道里)는 광산업이 발달해 일본인도 많이 거주하였고, 창도헌병주재소와 창도우편소까지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구한말 의병 출신으로 천도교 측의 만세시위 준비를 알고 있던 차에 3월 27일부터 김현기(金鉉基)와 주민들을 설득하여 3월 28일에 거사하기로 도모하였다. 그리고 옥양목으로 미리 큰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28일 낮에는 참가자 연명부를 작성하며 주민들의 시위 참가를 독려하였다. 그날 밤 8시가 되자 관디골 서당에 100여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창도시장을 향하여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기오면내에 도착하면서 시위대는 크게 늘어났다. 기오면내에 들어서서는 평소 주민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면장 이준재(李俊宰)의 집과 그가 숨어있다는 우편소로 몰려가 “면장 나오라”며 돌을 던졌다. 시위대의 일부는 면사무소에 들어가 밤새 시위를 벌였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에 해산을 압박하였고 결국 만세시위는 자정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다음날인 3월 29일 새벽까지 산발적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날 아침 100명의 주민을 규합하여 다시 만세시위에 나섰다. 그날 밤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해 면사무소 앞과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공격하였다. 이틀에 걸쳐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김화군수가 현장에 출동하였고, 헌병들은 총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현장에서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인 우편소장은 우편소를 공격하는 주민들에게 검은색 잉크를 뿌렸고, 다음날 일본 헌병은 옷에 잉크가 묻어 있는 주민들을 체포하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붙잡혀 1919년 9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죄」 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제기하여 그 해 11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임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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