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洙
在洙1888. 11. 19 ~ 1955. 9.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진영사건
- · 경북의열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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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8) 1888년 11월 19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상주면(尙州面) 인봉리(仁鳳里)에서 태어났다. 가계와 성장과정은 미상이다. 호는 무성(無聲)이다. 경남은행 구포(龜浦) 지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20년 8월 6일, 의열단원(義烈團圓) 배중세(裵重世)로부터 경찰의 추적 검거 대상이 되고 었던 이일몽(李一夢, 본명 이수택(李壽澤))과 윤치형(尹致衡)을 당분간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의 거소에 숨겨줄 것을 간청 받고 수락하였다. 이일몽과 윤치형은 초기 의열단의 후견자들이었다. 이일몽은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 거사용 폭탄 16개 중 2차 밀반입분 13개의 보관과 운반 책임자였고, 윤치형은 자금조달 임무를 맡고 있었다. 거사 계획이 경찰에 탐지되어 6월 중순부터 실행 요원들이 속속 붙잡히던 상황에서 배중세는 구영필(具榮珌)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요청한 것이었다. 다음 날인 8월 7일에 이일몽을, 8일에 윤치형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다. 8월 9일에 경기도 경찰부 순사 미나미 추오헤이[三竝忠平]가 들이닥쳐 두 사람을 찾아내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이일몽을 친척 김기동(金基東)이라고 속여 체포를 면하도록 해 주었다. 이웃인 김수현(金秀鉉)의 집에 숨어있던 배중세에게도 윤치형이 붙잡혀갔음을 알리고 속히 떠나도록 일러주어 피신할 수 있었다. 계속된 경찰의 수사와 추적으로 배중세가 9월에 붙잡히고 이때 이들을 도와준 사실이 드러나 즉시 붙잡혔다. 1920년 10월 9일 경성지법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1년 2월 28일 예심 종결과 더불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2년 구형을 받고,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 풀려났다. 1923년 3월 경남은행 하동(河東) 지점장에서 부산의 본점으로 전근되었다. 은행을 퇴직하고 어업에 종사하고 있던 1925년 9월, 의열단 간부 이종암(李鍾岩)이 거사 자금 조달 차 만주 지린성(吉林省) 뚱닝현(東寧縣)에서 밀입국하여 대구(大邱)로 왔을 때, 동월 14일 봉산정(鳳山町) 자신의 집에 은신시켜주었다. 또한 배중세가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달서면(達西面)에 1만여 원을 투자하여 공사 중인 수리 사업의 권리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경상남도 하동의 박종원(朴宗源)이 경상북도 포항(浦項)의 어장(漁場) 경영에 대한 투자금으로 낼 5천원과 부산의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자기 돈 5천원을 합쳐, 1만원을 10월 15일에 내주기로 약정하였다. 그러나 박종원이 약속 일자까지 돈을 마련하여 내놓지 못하던 중 달서면 노곡동(魯谷洞)의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신병 요양 중이던 이종암이 밀정의 제보로 1925년 11월 5일 경북 경찰부 고등과장의 급습을 받아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다른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서 12월 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두 번의 '구류갱신결정'으로 미결수로서 옥고를 겪다 1926년 10월 13일 보석 허가로 1년 만에 풀려났다. 11월 2일 예심 종결 때 면소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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