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寅植
寅植1879. 9. 20 ~ 1926. 2.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자신회
- · 대종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을사오적 처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9년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통감부에 항의문을 제출하고 항거하였다. 1907년 2월 3일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밀결사단체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200여 명에 달하였다.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정인국(鄭寅國, 전 군수)·김영채(金永采)·이광수(李光秀, 성균관 박사) 등과 상의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고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결의하였다. 거사에 필요한 무기와 자금 조달을 위해 각자 부인들의 패물을 팔았다. 이광수 2만 량 어음, 이용태(李容泰, 전 내부 및 궁내부 대신) 1,700원, 정인국 300원, 윤주찬(尹柱瓚, 농상공부 주사) 1,000원, 최익진(崔翼軫, 호위국원) 200원, 민형식(閔衡植, 학부 협판) 14,000냥, 김연호(金然灝, 전 참봉) 5,000금(金)이 모금되었다. 모금된 거사 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거사일을 2월 13일로 정하였다. 2월 13일은 (음)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진하(陳賀) 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 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자 박대하가 거사일을 3월 25일로 연기하였다. 결사대원 30인이 선발되어 이기(李沂)가 작성한 「자신회취지서(自新會趣旨書)」 와 애국가(愛國歌)·동맹서(同盟書)·참간장(斬奸狀)과 무기를 휴대하였다. 또한 윤주찬은 이광수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 올리는 글과 일제통감부와 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 및 내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3월 25일 아침 을사오적이 입궐할 때 조를 나누어 길목에서 지키다가 일제히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재차 거사를 계획하던 중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동지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철(羅喆)·오기호와 함께 4월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여 자현장(自現狀)을 내었다. 이로 인해 진도(珍島)로 5년간 유배되었다. 1909년 (음)1월 15일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였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나철·강우(姜虞)·최전(崔顓)·유근(柳瑾)·정훈모(鄭薰謨)·김춘식(金春植)·김윤식(金允植) 등 수십 명이었다. 이들은 대일 외교 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 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단군교 중광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취운정(翠雲亭) 아래 6칸(間) 초옥(草屋)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고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다음 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대종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1914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륭현(和龍縣) 청파호(靑波湖)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한 후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에는 윤영기(尹永淇)와 연락하여 전라북도 임실 만세운동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동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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